독서

[조선일보Books] 커튼

네다 2008. 8. 1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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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Books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
커튼
밀란 쿤데라 지음|박성창 옮김|민음사|232쪽|1만3000원

 

체코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는 1984년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중심으로 역사의 무게 아래 '견딜 수 없이 가벼운 개인들'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쿤데라를 세계적 작가로 급부상시켰다. 하지만 체코에서는 2006년에서야 뒤늦게 출간됐다. 공산정권 치하에서 금서였기도 했지만, 특이하게도 벨벳 혁명 이후 쿤데라가 체코어판의 정식 출간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2006년 체코어판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쿤데라는 "이 책을 (공산정권 시대에 대한)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설로 읽어달라"고 독자들에게 주문했다.

쿤데라는 왜 그런 요구를 했을까. 그의 에세이집 《커튼》을 뒤적이면 보다 명료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 〈인간의 양〉을 소개하면서 정치나 사회 묘사, 이념 등에서 벗어났을 때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이 소설은 일본인들이 잔뜩 탄 버스에 술 취한 외국 병사 한 무리가 올라타서 한 대학생 승객을 위협하면서 시작한다. 그 외국 병사들이란 일본을 점령한 미군들이다. 하지만 '미군'이란 단어는 이 소설에서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외국 병사에게 수모를 당한 승객과 그 꼴을 직접 당하지 않은 승객 사이의 대립을 통해 '비겁함과 수치, 정의감이란 허울을 쓴 경솔한 가학성' 등이 그려질 뿐이다. '미군'이란 한 단어를 포기함으로써 점령군(미군)과 패전국(일본)의 대결이란 정치적 텍스트로 귀결되지 않았고, 실존의 수수께끼를 조명했다고 쿤데라는 높이 평가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시키는 역사란, 인간 실존의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

현대소설의 역사와 미학을 다룬 이 책에서 쿤데라는 '훌륭한 소설 작품은 세상 앞에 드리운 커튼을 찢어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소설론을 개진하면서, '왜 인간은 소설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했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The art of roman)의 존재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