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 베카리아, 니체 외 27인 지음 / 장정일 엮음
열림원
10
무척 흥미롭게도 외국 저자와 한국 저자의 서문을 보면 크게 차이나는 것이 있다. 흔히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데, 서문에 나타나는 감사 인사의 길이만 보면 배은망덕지국이 아닌가 한다. 외국의 저작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주절주절 끝도 없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 반해, 한국 저자들은 고작 한두 명의 이름을 인색하게 거론하거나 아예 그마저도 언급하지 않는 책이 더 많다. 한국의 저자들은 외국 저자들에 비해 지식의 세계가 그 어느 세계보다 더 협업의 세계라는 사실을 잊는 것일까? 아니라면 '스승'을 포함한 지식 세계의 성원들이 워낙 인격적이지를 못해서 차마 감사를 바칠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거나. 참고로 움베르토 에코는 자기의 주변 사람 모두를 호명하면서 누구도 섭섭해하지 않을 예의바른 서문을 쓰는 법에 대해 한 편의 익살스러운 에세이를 남긴 바 있다.
42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
말, 행동, 한 민족이나 한 개인의 자연적 본성, 혹은 동물적 본성, 혹은 마지막으로 한 사물에 속하는 어떤 특성, 이런 것들이 만약 독특하면서 널리 알려진 것이라면 격언이 될 기회를 얻는다. 예를 들어 "페니키아인에 대항하는 쉬리아인" "악키제인", 즉, 무언가를 속으로 받고 싶은 것을 짐짓 거절하는 모양, "여우는 미끼를 물지 않는다" "두번씩이나 주는 배추는 죽음이다" "이집트산 미나리아재비" 등이 있다.
86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사람들이 자기 주위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거나, 혹은 운 좋게도 항상 행운만을 누리게 된다면, 그들은 결코 미신의 제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주 곤경에 빠져 속수무책이 되며, 운명의 변덕스러운 호의를 바라는 그들의 과도한 타욕은 그들을 번갈아 생기는 희망과 공포의 비참한 희생물로 만들기 때문에, 대개 그들의 어수룩함은 끝이 없다. 위기 속에서 그들은 지극히 사소한 자극에 의해서도 이리저리 동요되며, 특히 희망과 공포의 감정 사이에서 흔들릴 대 그러하다.; 하지만 다른 때에는 자만심에 차 있고, 허풍을 떨고 오만하다.
...학식있는 독자여, 당신이 고찰할 수 있도록 내가 여기에 제출한 논제들은 이와 같으며, 이 책의 전체와 각각의 분리된 장에서 논해진 문제들의 중대함 때문에 당신이 이 논제들을 흥미 있게 생각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더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서론이 길게 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특별히 주요 주장들이 철학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논문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이것을 시인하리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습관에 따라서 이 책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성가신 존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책을 무시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그들이 이성은 신학의 하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119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만일 제가 스스로 저의 출생지를 선택해야 했다면 그 크기가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다시 말해 잘 다스려질 수 있는 규모의 사회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는 각자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에 아무도 자신의 임무를 남에게 맡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 국가에서는 또 각 개인이 서로를 잘 알기에 악덕의 음흉한 술책도 미덕의 겸허함도 공중의 이목과 판단을 피하지 못할 것이며, 서로 만나면서 잘 알고 지내는 그 기분 좋은 교제는 자신의 소유지에 대한 열의보다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조국에 대한 참된 사랑이 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국가기구의 모든 활동이 항상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주권자와 국민이 똑같이 하나의 이해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국민과 주권자가 동일한 인격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에 저는 분별있게 절제된 민주정체에서 태어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159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생태계 전체를 볼 때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힘이 세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고, 이 자연 법칙은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보다 어느 정도 힘이 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고귀한 특권이다. 그런데 남성은 이에 족하지 않고 우리 여성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일시적 희롱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그런가 하면 여성 또한 욕정에 사로잡힌 남성의 밀어에만 정신이 팔려 그들과 지속적인 사랑이나 우정을 가꾸려 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샌퍼드와 머튼>에 들어있는 몇 가지 교훈담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여성 교육을 다룬 저자들이 한결같이 범한 오류, 즉 상류층 여성들ladies만을 다루는 걸 피하고, 대신 좀더 강한 어조로 중산층 여성을 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중산층 여성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거짓된 세련, 부도덕, 허영의 씨앗을 뿌린 것은 아마 항상 상류층의 짓이었을 것이다.
170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인간은 두가지 약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실존과 관련이 있으며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즉, 어느 곳에서든 인간은 '기도'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토대가 된다. 인간은 '탄원'을 올려야 할 존재를 그리기 위해, 또 '사랑'하는 존재를 노래하기 위해 소설을 만들었다. 공포와 희망으로부터 생겨난 첫번째 종류의 소설은 어둡고 거대했으며 거짓과 허구로 넘쳐났다.
...소설이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식은 분명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지식이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듯이, 이 중요한 지식은 '불행'이나 '여행'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보아야 하고, 그들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피해자가 되어보아야 한다. 불운은 자신이 박해하는 자의 성격을 고양시키면서, 인간을 연구하기에 적절한 거리에 그를 위치시킨다. 마치 폭풍우로 인해 조난당한 여행자가 암초 위에 서서 격노하는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듯이, 불운의 희생자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인간은 바라본다. 그런데 자연이나 운명이 그를 어떠한 상황에 놓을지라도, 그가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말을 아껴야 한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반면 경청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수다쟁이가 바보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도덕으로 어색하게 치장하지 말라. 소설에서 사람들이 찾는 건 도덕이 아니다. 계획상 반드시 필요한 인물들이 때때로 이치를 따져야 할 경우, 그때라도 추론한다는 의식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야 하며,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도덕론을 펼쳐야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는 자는 인물이어야지 결코 저자여서는 안된다.
결말은 어색하거나 의도적인 느낌이 들지 않게, 항상 상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귀결되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지옥의 색깔이 아니고서는 결코 범죄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벌거벗은 범죄를 보기를,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범죄를 특정짓는 모든 공포와 함께 범죄를 제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범죄를 장미로 치장하는 자들은 불행할지니! 그들의 관점은 순수하지도 않으며 나는 그들을 결코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207
앙리 뱅자멩 콩스탕 드 르베크 <아돌프>
아무리 무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면 그 자신도 괴롭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경박하다거나 타락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묘사해보고 싶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주는 고뇌의 모습은 마치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구름처럼 희미해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세간의 찬사에 용기를 얻지만, 이 세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여서, 규칙에 따라 주의主義를 보충하고 관습에 따라 감동을 보충하고, 추문도 배덕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번거로운 것으로 미워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추문만 없으면 악덕도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반성 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고민이나 배신당한 영혼의 비통한 놀라움이나 완전한 신뢰 뒤에 이어지는 의심,
214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이런 종류의 이론에 꼭 맞는 모습을 보려면 리히텐베르크의 소방 규정에서 일부만 읽어보면 된다.
"어느 집에 불이 나면 무엇보다 먼저 그 왼쪽에 있는 집의 오른쪽 벽과 오른쪽에 있는 집의 왼쪽 벽을 덮으려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왼쪽에 있는 집의 왼쪽 벽을 덮으려고 한다면, 그 집의 오른쪽 벽은 오른쪽 집의 왼쪽 벽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이 이 벽과 오른쪽 집의 오른쪽 벽에 닿아 있기 때문에(그 집은 불난 집의 왼쪽에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오른쪽 벽은 왼쪽 벽보다 불에 가깝다. 그 집의 오른쪽 벽을 덮지 않으면 불이 왼쪽 벽으로 오기 전에 오른쪽 벽으로 옮겨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덮지 않은 벽에도 불이 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곳을 덮지 않으면 다른 곳에 불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을 놔두고 다른 곳을 덮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한다. 즉 어느 집에 불이 나면 그 오른쪽 집의 왼쪽 벽을 덮고 왼쪽 집의 오른쪽 벽을 덮어야 한다."
저자는 이런 헛소리로 독자들의 정신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고, 별로 좋지 않은 것에 물을 부어 맛을 더 없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220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한다면, 죽음조차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하물며,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고뇌라고 불리고 있는 일체의 것, 즉 사망, 병, 비참, 환난, 곤고, 재난, 번민, 근심, 비애 등 일체의 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체의 것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고통스럽고, 우리들 인간이, 혹은 고통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이건 죽음보다 더 고약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체의 것은 그것이 병이 아닌 한에 있어서 병과 동등하게 취급될 수는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는 그것들은 역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체의 지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관하여, 또 죽음까지도 이렇게 초연히 설 수가 있다면, 이 때문에 그는 결국 거만한 심정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다시 거기서 인간이 인간 자체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비참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참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258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죄와벌>
이상이 머리말의 전부이다. 이따위 머리말은 불필요하다는 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미 다 쓴 것이니 그대로 둔다.
316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나는 고발한다>
그리고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한 권의 책이 드레퓌스 사건의 역사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드레퓌스 사건의 역사란 여전히 열정이 앞서는 오늘 이 시점에서, 그것도 정히 필요한 자료 없이는 도저히 씌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잠시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으리라. 특히 관련 자료를 정말 사심 없이 검토할 필요가 있으리라. 지금 내 소망은 단지 후일의 자료 목록에 내 글을 덧보태는 것, 즉 내 증언을 남기는 것, 즉 사건의 한모퉁이에서 행동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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