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골트이야기The Story of Lucy Gault
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 / 정영목
한겨레출판사
188
"온 세상에서, 레이프, 가장 바라는 게 뭐에요?" 그는 허리를 굽혀 모레에서 조약돌을 집어 들더니 물수제비를 떴다. 두번, 이어 세번째로 돌은 수면을 스치며 튀어 올랐다. 이제 그의 수줍음은 좀 사라졌는데, 그가 그녀를 전보다 잘 알게 되어서 또는 그렇다고 상상해서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그녀는 그의 수줍음과 상냥함을 좋아했다. "오, 아마도, 매일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것 같은데요." "그게 내가 하고 있는 건데요." "그렇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거죠." "떠나면 보고 싶을 거에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대를 받으면..." "할일이 있잖아요."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죠?" "어, 전부 다죠, 생각해보면."
320
세심하게 바짓단을 밴드로 묶더니 오후의 방문객은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커다란 철제 자전거 위의 호리호리한 형체. 그들은 진입로를 따라 자전거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아버지가 안된 일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 어조에서 그녀가 옷을 왜 차려입었는지 아버지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진입로를 조금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다가 마침내 그녀의 분노가 터져 나와, 저만의 에너지로 그녀의 피로로부터 격렬하게 몸을 떼어냈다.그녀는 가버린 남자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괴로움이 진입로의 나무들에 메아리쳤고, 아버지가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의 눈물이 아버지의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만 됐어. 그만 됐어." 그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단 두 마디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시, 또 다시.
378
징검다리까지 내려가는 가파르고 좁은 길에서 쓰는 지팡이는 몇 주전에 둔 곳, 아치형 입구 옆 담벼락에 그대로 기대어 있다. 오늘은 그 어려운 나들이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전에 새겨놓은 이름 머리글자 위로 나무껍질이 자라고, 개울은 늘 그랬던 대로 굽이치지만 그녀가 돌아다니기 전에 그랬던 것보다 둑의 흙을 더 많이 훔쳐가지는 않는다. 그녀의 나들이는 오후를 다 잡아먹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는 새에 저녁이 찾아온다. 집에서 그녀는 달걀을 삶고, 토스트를 만들고, 부엌일을 마무리한 뒤에 또다시 방과 방을 돌아다닌다. 총채벌레들이 그녀의 자수 액자 유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 자리를 잡아서 작은 사체들이 바위 웅덩이와 꽃을 장식하고 있다. 아래층 욕실의 욕조에는 줄무늬, 변색된 녹색과 갈색 줄무늬가 생겼다.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에는 길게 갈라진 곳이 있다. 전구는 갓 없이 매달려 있다.
그녀는 응접실을 서성이며 손끝으로 여기저기 어루만진다. 캐비닛 문의 유리, 탁자 상판의 모서리, 누군지 모르지만 목자같은 느낌을 주는 골트 집안 남자의 초상화 밑 책상. 다시 어머니의 손수건에서 향기가 나고, 다시 아버지가 그녀를 레이디라고 부른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수국의 어둑한 푸른빛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진입로는 어슬어슬해져 나무들의 윤곽이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하다. 매일 저녁 이 시간이면 그러듯 떼까마귀들이 내려와 풀밭을 헤저으며, 하루가 희미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벗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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