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On Betrayal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 / 황미영
을유문화사
54
미국의 어린이들은 베네딕트 아널드 이야기를 완벽히 이해하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의 모순은 피해갈 수 없다. 이는 기지가 넘쳤던 이스라엘의 수학자 기드온 슈바르츠Gideon Schwarz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기드온이 미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하루는 극우주의자 상원의원이 찾아와 말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거라곤 섹스, 약물, 반역뿐이군요." 기드온이 반박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걸 산부인과의학, 약학, 미국 독립 전쟁의 역사라고 부르죠." 이 이야기의 핵심은 마지막 부분, 즉 반역을 미국 독립 전쟁이라고 칭한 부분에 있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이 부분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왕위에 대한 반역행위의 결과로 미국이 탄생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61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인간이라는 행위자들이 공언하는 도덕적 동기를 멸시하는 동시에 불신했다. 와일드는 평생에 걸쳐 딱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어 '얄팍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 사람들이 신의 그리고 정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무기력한 관습 또는 상상력의 부재라 부른다."라고 말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배신은 자유롭고 활발한 상상력의 표현이지만 신의는 지루한 소심함이다.
92
인간관계 측면에서 보면 가족과 친구는 두터운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사례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어떤 비유적 확장이 자연스럽고 또 과장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회사 간부가 부하 직원에게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가족입니다."라고 말한다면 터무니없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별 의미 없이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 관계와 연결된 신의와 따뜻한 애정을 기업이라는 냉혹하고 계산적인 집단에 인위적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94
실제로 스토아학파에는 종류를 불문하고 두터운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은 사람이 두터운 관계로 묶이면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다고 믿는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변덕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급자족만이 시간의 변덕을 버틸 수 있게 한다. 삶에서 진정으로 좋은 것이라면 만약의 사태를 모두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두터운 관계는 좋은 것이 못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지독하게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갖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좋은 것들은 관계와 상관이 없다. 관계에는 의존이 따른다. 좋은 것들은 인격과 관련된 특성이다. 이런 인격적 특성은 언어학적으로 '현명하다'나 '용감하다' 등의 한자리 술어로 표현된다. 좋은 삶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인 윤리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미덕을 다루어야 한다.
106
세계는 이 민족에게서 살아있는 자들 사이를 걸어다니는 죽은 자들의 낯설고도 친숙한 형태를 발견한다. 살아있는 시체의 유령, 다시 말해 통합체도 조직도 없고, 땅이나 다른 통합의 끈도 없으며, 더 이상 살아있지 않지만 살아있는 자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 민족의 유령 -이전이나 이후에도 다시 보지 못할, 역사적 전례가 없는 이런 형태의 유령은 이상하게도 여러 민족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두려움이 선천적이고 인류의 정신세계에서 어떻게든 정당화될 수 있다면, 죽었지만 계속 살아있는 이 민족이 미치는 영향에 놀랄 이유가 무엇인가.
107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에서 유대인의 사회적.경제적 위상에 특별히 유별난 점은 없었따. 많은 농업 사회와 목축 사회에서는 원주민이 수행할 수 없거나 수행할 마음이 없는 일을 수행한, 영원한 이방인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셰이크 모하마디Sheikh Mohammadi 부족에서부터 아프리카 말라위호Lake Malawi의 야오Yao족, 아르메니아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아시리안인, 해외에 사는 인도인과 레바논인, 중국인까지 모두 토박이가 땅을 지키고 사는 농경 사회 속에서 낯설고도 친숙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 토박이들이 함께 "먹지도 않고 결혼하지도 않았던" 이 영원한 이방인은 주로 상인, 장인, 연예인, 사업가로 활동했고, "땅이 아닌 시간에 집착하며 고향이 없는 과거의 민족, 뿌리가 없는 태고의 민족"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방랑 생활을 하는 이런 부족은 음식에 대한 금기를 잘 지키고, 동족끼리 결혼하며,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언어를 간직한다. 이런 풍습이 유대인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유대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게다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방랑 민족에 대한 고정 관념은 거의 항상 똑같다. 욕심이 많고 정직하지 않으며 교활하고 자신만만하며 배타적이고 소유욕이 강하고 상스럽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다른 민족보다 더 신화화된 것은 아마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형성 과정에서 담당한 역할 때문일 것이다.
111
'제5열'과 '트로이 목마'라는 관용 표현은 외부의 적을 위한 선동, 사보타주, 전복 등에 대한 현존하는 그림들을 근간으로 한다. '사보타주Sabotage'라는 단어는 16세기 신기술에 반대한 이들이 나막신sabot을 던져 직조기를 부수었던 잊힌 그림에서 유래했다.
120
많은 경우, 공유된 집단 기억은 기억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공유된 기억이다. 이집트 탈출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기억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공유된 집단 기억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다. 깅거하는 사건이 먼 과거일수록 사실과 허구 사이의 전투에서 허구가 이길 확률이 높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종교가 갖는 강점이다. 토대가 되는 이야기들을 희미한 오랜 과거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반면, 모르몬교 같은 신흥 종교는 신도들을 설득하기가 훨씬 힘들다. 어떤 경우든 두터운 관계에서는 진짜 기억과 허구가 뒤섞여 과거에 대한 태도를 형성한다. 그 관계에 개입한 사람이 많을수록 허구보다 사실이 적어진다. 과거에 대한 공유된 집단 기억은 실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 과거의 기억에 대한 기억에 가깝다.
146
성취 중심의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성취했는가에 따라 끊임없이 재평가될 수 있다. 중개인이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우리에게는 그 사람의 실적을 재평가할 좋은 이유가 생긴다. 물론 게으름이나 타성때문에 실적을 재평가하거나 재평가에 근거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귀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하기만 한다면 재평가할 수도 있고, 어쩌면 신중하게 재평가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소속 중심의 두터운 관계는 소속의 특성상 지속적인 재평가를 받는 일이 없다. 친구와의 우정이 친구의 행동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는다. 친구와 공유한 공동의 감정 은행 계좌에 우정을 지속할 수 있는 감정 '자본'이 충분히 쌓여있기 때문이다. 우정과 지속적인 재평가 정책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날마다 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는 관계를 끊임없이 새로 시작해야 하나, 지속적인 우정이 맞지 않는다. 이는 다른 두터운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두터운 관계를 재평가 하려면 아주 좋은 이유가 필요하고, 배신은 이런 이유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런데 배신 때문에 관계가 위협받을 때 재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 관계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가? 나는 우리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등의 고통스러운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앞에서 두터운 관계는 함께한 과거에 기초한다고 말한바 있따. 함께한 과거는 관계를 구성하는 요소다. 그런데 배신이 그 함께한 과거에 색깔을 칠하는 것이다.
247
'이주 노동자' 혹은 '손님 노동자'라는 뜻의 gastarbeiter는 원래 나치가 '이방인 노동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fremdarbeiter라는 표현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손님은 환영받는 대상이지만, 두터운 관계와 얕은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대상이기도 하다. 손님은 두터운 관계를 맺은 사람과 얖은 관계에 있는 이방인 사이에 속하는 한계적 범주에 속한다...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은 자주권의 상징이며, 무력하다는 것은 자기 영역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방인을 포함해 자기 집의 지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은 그 가정에 대한 자주권을 상징한다. 롯의 사례에서 침해당하는 것은 주인과 손님 사이의 두터운 관계가 아니라 가정에 대한 롯의 자주권이다. 그리고 손님은 주인의 이런 환대에 고마워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민족-국가에서 이주 노동자는 손님으로 인식된다. 원주민이 이들 노동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을 받아준 국가의 호의에 영원히 감사하는 것이다. 이주 노동작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지만, 손님이라는 위치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들의 위치는 손님의 특권중 일부를 누리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 나라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들의 충성심은 항상 의심을 받는다. 이들을 받아준 국가와 이들이 태어난 국가 사이에 충돌이라도 생기면 이민자들은 곧바로 용의자가 된다. 이민자들을 면밀하게 조사하지 않으면 배은망덕한 이 사람들이 적국의 열렬한 지원자가 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251
착취적인 사회에 산다고 느끼는 시민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시민은 그 사회의 착취적 구조를 철폐하려면 혁명같은 철저한 변혁을 거쳐야 한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은 자신의 적이기 때문에 지배 계층에 반대하는 이들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친구에 그치지 않고 사회 변화를 일으킬 때 중요한 수단이라고도 생각한다. 또한 지배계층이 무엇이 합법이고 누가 적인지를 결정한다고 철저하게 믿는다. 이 시민은 '친구'니 '적'이니 하는 헤게모니적 꼬리표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마워할 명분도 고마워할 대상도 없다고 느끼며,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 이 나라를 통치하는 정부에는 전혀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또한, 지배 계층만을 위해 일하는 정부에 맞서 싸우는 '인민의 친구'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자신의 혁명적 의무라고 믿는다. 이런 식의 사고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친숙하다. 적어도 일정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285
표면적으로 볼 때 '부역'이라는 단어는 점령당한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반면, 점령한 사람 입장에서는 도움을 주는 긍정적 의미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다. 점령한 사람들이 부역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가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쓸모 있지만 사용한 후에는 더러워서 버린다는 것이다.
288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됐을 무렵, 전 세계의 85퍼센트 정도가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다. 여기서 식민 통치란 본거지를 다른 곳에 둔 A나라가 C나라를 지배하는데, A의 지배가 직접 또는 강압적 위협을 통해 수행되는 경우 C는 식민 통치를 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대체로 식민 피지배자는 지배자(군인과 민간인)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다. 이를 통해 식민통치가 식민 피지배자의 대규모 협조 없이는 유지되기 힘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식민 정권을 바라보다는 토착민의 시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적으로 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토착민의 시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식민 피지배자들이 식민 지배자들을 '당연한' 통치자로 받아들이는 대신 온전한 의식을 가지고 적으로 판단해야만 부역이 배신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점령자를 적으로 간주한다고 해서 반드시 점령 초기부터 그런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점령자를 후원자로 간주하다가 나중에 침략자로 여기는 식의 관점 변화는 점령이 진행되는 중에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식민주의가 일부 현지인의 대규모 부역 때문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식민 통치에 부역한 것을 모두 배신으로 간주한다면 배신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배신이라면 사실상 아무 것도 배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291
비자박절이고 개인적인 부역은 부역의 사례로 보기 어렵다. 적어도 부역의 정확한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자식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하면 누구나 적에게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부역자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역자의 정확한 사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역할에 대한 강압은 받았을지 몰라도 개인적 강압은 받지 않는 상황에서 의지에 따라 부역하는 자다. 내가 비자발적으로 적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부역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은, 비자발적이라는 이유로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 정당화되기 때문이 아니다. 강압은 핑계가 될 수 있지만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핑계라는 말은 그들의 행동이 잘못됐지만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반면, 정당화는 그들의 행동이 겉으로 보기엔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292
비자발적 부역을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으로 구분하면서, 둘이 동시에 일어난 중요한 사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끔찍한 사례 중 하나로 나치 정권이 여러 게토ghetto에 설립한 유대인 평의회Judenraete를 들 수 있다. 나치 정권은 평의회를 통해 강제 노동을 공급하도록 하고, 강제 수용소로 보낼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하며, 수용소의 유대인을 죽이는 데 일조하도록 하는 식으로 평의회를 이용해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정책을 구현하고자 했다. 독일에 점령당한 유럽에서 유대인이 독일로부터 집단적 또는 개인적으로 잔혹한 강압을 당했다는 사실은 여지가 없다. 여기서 유대인 평의회 의원과 관련해 생기는 의문은 그들이 평의회에서 활동하도록 강압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심한 처벌을 받지 않고 그 제의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의문은 평의회에 일단 들어간 후에 잔혹한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내가 알기로 평의회 의원 중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고, 전부 남자였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0) | 2018.02.01 |
---|---|
빌리 린의 전쟁같은 휴가Billy Lynn's Long Halftime Walk (0) | 2018.01.26 |
미중전쟁 (0) | 2018.01.08 |
파트너 (0) | 2017.12.29 |
구스타프 소나타Gustav Sonata (0) | 2017.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