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문학동네
25
"스페인 속담에 '전령을 죽여라'라는 말이 있지. 그라나다를 통치하고 있던 무어 왕국의 마지막 왕은 알아마 지역이 기독교도들에게 함락되었다는 편지를 받았지. 그건 곧 왕국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걸 왕은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신하나 백성들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할 순 없었어. 그래서 편지를 불 속에 던져버리고 그걸 가지고 온 기독교도 전령을 살해했다네. 그 행동 덕분에 한동안 무어인들은 기독교도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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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금발에 노란 스웨터를 입고 알이 굵은 진주목걸이를 두르고 있었으며 자신의 인생보다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인생을 통해 시간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늙었으나 신산한 시행착오를 수습하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낭비한 것 같진 않았다....
컨설턴트와 카운슬러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부와 명예를 누리는 반면 책임져야 할 사항은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상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그들은 번영을 누릴 것이 분명했다. 세상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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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안토니오는 유태인이 아니지만, 단 한 컵의 물이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자를 살리고 어떤 자를 죽였다는 이야기 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자신들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야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제3제국의 구원자로서 더욱 대담하게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나치는 생각했다. 고된 노동을 마친 수용자들에게는 한 잔의 물이 제공되었는데, 그걸 단숨에 들이킨 다음 진창을 구른 자들은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했지만, 절반을 마시고 나머지 절반으로 얼굴과 손을 씻은 자들은 끝까지 살아남았단다.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며 자신과 같은 인간이 주위에 존재하고 있어서 언제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은 곧 지옥이 될 것이고 서로를 증오하고 학살하다가 자신이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자살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저항하더라도 결국 공장은 폐쇄되고 직원들은 모두 해고되겠지만, 마지막 남은 자가 모든 직원들을 대신하여 금붕어처럼 하찮은 존재에게까지도 관심을 쏟는다면, 직원으로서는 실패했을지언정 인간으로서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연못 속의 금붕어들은 물과 공기와 태양과 시간이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잉여들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므로, 그저 제자리에 놔두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어느 누가 그것들을 훔쳐갔단 말인가. 집에 변변찮은 어항 하나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그저 사무실의 텔레비전이나 프린터를 차지하지 못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것을 훔쳤다가 수일째 양동이 속에 담아 놓고 있다면 안토니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악의 욕설로 그 절도범에게 저주를 퍼부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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