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폭풍의 한가운데Thoughts and Adventures

네다 2019. 5. 2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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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한가운데Thoughts and Adventures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 조원영

아침이슬


탁월한 정치본능, 불굴의 의지력, 냉철한 선견지명, 미래지향적인 시대정신, 전쟁 전문가, 영국이란 나라의 화신, 문학의 거장.

그 중 가장 탐나는 능력은 독보적인 유머감각이다.

단연코 처칠 때문에 영국식 유머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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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이가 들면 우연이란 것의 존재를 믿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사에 개입하는 이 전능한 요소가 단지 단순한 사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간단히 믿기가 어려워진다. 우연이나 행운, 숙명, 운명, 운수, 섭리와 같은 말들은 같은 내용을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삶 자체가 끊입없이 외부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고 느낀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인생을 십 년만 돌이켜 보더라도, 하잘 것 없는 작은 사건이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기억을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평상시와는 달리 전쟁이라는 삶의 격렬한 현장에서는, 우연이란 요소는 평소의 베일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매순간 모든 사건의 직접적인 중재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소령님 자리가 포격을 당했습니다."

"피해는 없었나?"

"짐은 무사합니다만, 사병이 한 명 죽었습니다. 들어가지 않는게 좋으실 겁니다. 아직 엉망입니다."

이제야 중대 식당에서 들은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났나?"

"소령님 떠나신 지 5분 정도 지나서였습니다. 소형 초고속 폭탄이 지붕을 뚫고 들어와서 사병의 머리를 날려버렸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늘 사령관에게 품었던 울화가 싹 가셨다. 울적했던 심사가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숙소로 걸어가면서 나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를 잊지 않고 지금은 자기의 부하인 나에게 예의를 갖추어 만나보자고 전갈을 준 그 사령관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에 잠기면서,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손을 뻗어서 절대 절명의 순간에 나를 치명적인 장소에서 끌어내주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손이 그 사령관의 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신비한 손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152

시인 라 퐁텐의 다음 글귀를 우리 모두 기억하자.

인간은 피해가려고 택한 바로 그 길목에서,

자주 운명적인 만남을 체험한다.

인류역사상 고대 이집트인만큼 죽은 사람에게 극진한 공경을 바친 민족도 없다. 그들의 최대 희망은 지상에서의 삶의 흔적을 훼손 받지 않고 영원히 품위 있게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그 속 깊이 무덤을 만들고, 무덤까지 이르는 수직갱도와 수평갱도를 미로와 같이 서로 얽히도록 설계하였으며, 여기에 시체 방부처리 기술까지 가세해서 그 방면에 있어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말았다. 4천년 동안이나 은신처에서 고이 쉬고 있던 이집트 왕과 왕자들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불락 박물관의 전시실로 끌려나와 일반 대중의 냉담한 눈초리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희생과 기술을 총동원해서 결국에는 그들이 그토록 기피했던 바로 그 상황을 연출해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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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의 첫 단계에서는 독일의 해상 함대가 영국의 월등한 해군력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으나, 이어진 1916년 10월 이후의 제2단계는, 영국 해군과 독일 유보트 간에 사활이 걸린 한 판 승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치러진 전투는 잔인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 이외에도, 이제까지 알려진 역학, 광학, 음향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응용가능한 과학적 지식이 총체적으로 동원되었고, 도표와 계산, 문자판과 스위치로 치러진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투와는 판이하게 달랐으며, 이러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쟁영웅으로 대접받고, 거대한 선박들이 망망대해에서 아무런 도움이나 은총의 수단도 없이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수많은 승무원들이 바다의 원혼이 되어 떠도는 그러한 전쟁이었다. 이렇게 참혹한 과정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세계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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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격렬했던 논쟁의 한편에는, 민주적인 의회제도에 의해서 사안을 담당하게 된 아마추어 정치인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 상대방은 제대로 훈련받은, 유능하고 경험 있는 해군성의 전문가들과 숱한 전투경험을 갖춘 훌륭한 장군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정치인의 판단이 옳았고 해군성이 틀렸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분명 자신들의 전문영역이 아닌 기술적이고 직업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정치인의 판단이 옳았고, 소위 전문가일 수밖에 없는 해군성의 핵심 권위자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은, 한편 대단히 놀랍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국가의 명운을 건 투쟁에서, 자신들의 최고 권위를 내세우며 해군성이 제안하고 뒷받침했던, 편견에 치우친 잘못된 주장들을, 궁지에 몰린 민간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줄기차게 물고 늘어져서 마침내 그 두터운 벽을 허물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황제와 그의 대신들은, 해군 전문가가 제시하는 자료 및 숫자와 전문가의 견해를 최종적인 결론으로써 받아둘이는 것이 보통의 흐름이다. 홀첸도르프 제독이 1916년 12월 22일자 메모에서 밝힌 건의 내용인, 무제한적인 전쟁행위의 필요성과 월 60만 톤 상당의 영국 함정을 격침할 수 있다는 계획 및 5개월 내로 영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계산은, 그가 독일 제국의 해군참모장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내세웠던 것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반론을 펼 생각을 품지 못했던 것이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해군 동료들의 견해에 대해 같은 군인의 입장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반면, 수수께끼와도 같은 주장 앞에 말문이 막힌 민간 정치세력은, 만약 전문적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생명이 걸린 중대한 사안을 앞에 놓고 나약함과 소심함으로 일관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군부의 의견에 굴복하고 말았고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재앙을 향해 줄달음쳤다.


222

독자들은 전쟁행위라른 것이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깊숙이 타락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이제 이 음울한 시대에 전쟁이란, 인간의 대량살육을 위한 모든 기계적인 수단의 총집합 이외에는 별다는 의미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전쟁터가 마치 시카고의 도살장에 보내기 전에 일시적으로 거치는 가축우리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헤이그-파샹텔 부류의 초대형 공격에 속하지만 규모에 있어 훨씬 더 큰 이번 공격은, 전사에 기록된 모든 전투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면서도, 개인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엄청난 규모와 비인간적인 구조 자체가 루덴도르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특성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이런 계산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으며, 그가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의 진수가 여기 담겨 있었던 것이다. 


225

독일제국이 안고 있던 치명적인 약점은, 직업에 관한 전문지식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군 지도자들이, 국가의 모든 정책에 관하여 조정자로서 행세할 수 있었던 데 있었다. 프랑스의 민간 정부는 전쟁 기간을 통틀어서 가장 어둡고 처절했던 시기에도, 국가 존립의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항상 국정운영의 최고 기관으로 기능해 왔다. 대통령, 총리, 전쟁 장관, 의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총체로서 지칭하는 '파리'는 항상 통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서, 제아무리 큰 공을 세운 군인이라도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의회의 기능이 거의 중지된 상태였다. 언론은 스스로를 '군인들'이라고 부르던 장군들을 한껏 치켜세웠다. 그러나 영국에는 강력한 정치 계급제도와 서열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들이 일단 자신의 존재를 걸고 문제 해결에 나설 경우, 여하한 고급 장교와도 정면으로 맞붙어 꺾을 수 있는 저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민간적인 요소가 워낙 막강한 나라라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미숙한 군부의 실력자들을 키워주고 북돋워주어야할 필요가 있을 정도였다. 독일의 경우는 군부에 맞서 국가를 구제하는 의사결정 과정에 자신들의 의지와 특수한 관점들을 조화시켜 이끌어갈 만한 민간 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였다.

알렉산더나 한니발, 시저, 말버러, 프레데렉 대왕, 나폴레옹, 그들은 모두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는 단지 한 단원만을 배웠을 뿐이고 그 단원에 대해서만큼은 정통했다. 누구든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지독히 숭고한 성품을 헐뜯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국가의 명운이 걸린 대 격전을 치르는 마당에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독일의 경우는 그밖에 갖췄어야 할 요소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주 철저히 억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257

페탱은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유의 전쟁은 대개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법인데, 첫 단계는 어떤 형태든 전선을 형성하는 단계로써, 우리가 처해 있는 단계는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단계이지요. 두 번째 단계는 대포의 단계로, 우리가 이제 막 들어가려는 참입니다. 48시간 내로 강력한 포병 조직이 갖춰질 것입니다. 그 다음은 탄약 공급의 단계로서 완벽히 준비하는 데 나흘이 소요되지요. 그 다음은 도로입니다. 일주일 내로 소통이 가능한 완벽한 도로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도로를 닦기 시작한 셈입니다. 만약 지금 전선을 고수해 줄 수만 있다면 시간에 맞춰서 도로를 완성시킬 수 있겠지만, 만약 고수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지요."


291

당신이 연단에 나타나면 다른 연사들은 자리에 앉게 되는데 (이 때 환호가 일든지 아니면 야유가 쏟아지기도 한다), 때때로 600-70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장소에서 지극히 둔감한 표정을 한 20-30명의 청중만을 놓고라도 연설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곳저곳 장소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조금씩 현장 상황에 맞게 변형된 똑같은 내용의 연설을 들어야 하는 당신 부인이나 딸, 친구들의 고역을 생각하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어느 총회 회장, 부회장은 시시껄렁한 똑같은 농담을 서른세 번이나 들으면서도, 그때마다 성실하게 웃어주는 것을 보고 참 대단하구나 하고 감탄한 적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농담을 한참 더 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때마다 열심히 들어주고 열심히 하!하!하! 잘 한다!를 연발해야만 될 친구의 입장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헌법은 이런 식으로 운용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슬에 묶인 갤리선 노 젓는 노예와도 같은 신세로, 감독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춰 일산불란하게 움직이며 점점 거세지는 풍랑을 묵묵하게 헤쳐나갈 뿐이다.


293

해리 커스트는 사우스 램버스 선거구에 출마하여 어느 회합에 참가했다가, 갑자기 덩치가 집채만한 녀석이 권투 폼을 잡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상의를 벗어던지고 맞대결할 채비를 차리면서, 뒤에 있는 친구에게 귀엣말로 "야, 말려, 말리란 말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294

작고한 디본셔 공작, 하팅턴 경은 대중 회합에 관하여 여러 번 나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는 하원에서 꽤 중요한 연설을 하던 도중에 하품을 하는 바람에 심하게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진짜 그랬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당신은 그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연설을 듣고 있는다는 말이오?" 하는 게 아닌가. 언젠가는 한 술 더 떠서, "꿈을 꾸었는데, 내가 하원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일어나봤더니, 어럽쇼! 내가 진짜로 연설을 하고 있지 않나!"


297

만약 승리했다면 실제로 당신이 어떻게 느꼈는지에 상관없이 그동안의 공정했던 선거 분위기를 추켜올리는 동시에 지체없이 당에 관계없이 모든 선거구민의 수호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도록 해라. 만약 패자가 된 경우, 승자를 축하해 주고 그가 의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사람이라는 덕담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크게 상심하고 비통해하였으며, 게중에는 존 몰리나 윌리엄 하커트와 같은 저명인사들까지도 선거의 패배 앞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고 오히려 상대방만 더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차라리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속은 쓰리더라도 태연한 척하는 편이 훨씬 낫다. 실상 정말 가슴 아픈 것은 지지자들의 슬퍼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때로 통렬하기까지 하다. 몇 주일간 정말 사심 없이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남녀 자원 봉사자들의 두 뺨에는 눈물이 강을 이루고, 그 표정은 마치 세상이 끝장난 것과도 같아 보인다. 선거 패배의 가장 힘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317

글래드스턴은 당시 하원에서 아일랜드 자치법안의 표결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아일랜드는 지금 여러분의 결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기대에 찬 모습으로 애원하고 있는 그들의 말은 진실되고 진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나간 과거를 모두 망각의 세계에 묻어버리자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털어버림으로써 득을 보는 측은 오히려 우리가 아닙니까? ... 신중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애원합니다. 현명하게, 당장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제발 길게, 먼 앞날을 내다보고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03년 아일랜드의 요구는 하원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상원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후 4년에 걸친 격렬한 당쟁을 치른 후, 1914년 이번에는 보수당에 의해 아일랜드 자치법안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의회에 상정되어 결국 통과하였지만, 그 내용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에 의해 내전 일보직전까지 치닫던 중,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포성 속에 묻히고 말았다. 자치법안은 드디어 법령으로 성립되기는 하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행을 유보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356

그 결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요새화된 마을 단위로 굶어 죽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전 국민이 조직적인 아사 작전의 제물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모든 국민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여하는 세상이 되었으며, 동시에 공격 목표가 되었다. 하늘의 길이 열리면서, 옛날에는 살상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덕에 안전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과, 어린이, 노약자, 병자들에게까지도 폭력과 죽음을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으며, 또 한편에서는 철도와 기선, 자동차라는 경이로운 운송수단이 등장해서 수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다. 치료수단과 수술의 발달로 부상을 당하더라도 또다시 계속 도살장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끝없는 소모전을 위해 남아나는 것은 없으며, 최후의 안간힘까지 모두 연소시키게 된다.


358

우리가 평화라고 부르는 시대는 사실상 이러한 여건을 숙성시키고 있는 탈진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전반적인 상황의 흐름을 점검해 보노라면, 마치 아련한 안개 속에서 서서히 자태를 드러내는 거대한 산맥처럼 움직일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전율하게 된다. 이제부터 전쟁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전쟁이 될 것이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전 국민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만약 자국민의 생명이 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판단될 경우,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다음 전쟁에서는 대량 살상용 일반무기와 화학무기들이 무제한으로 동원될 것임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며, 더욱 가공할 일은 이러한 무기는 일단 사용되기 시작하면 통제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이러한 상황에 다다랐던 적이 아직은 없었다. 이제 처음, 인류는 적절하게 자제할 수 있는 지혜나 고양된 도덕심의 한계를 벗어나서, 자신이 만들어낸 무기에 의해서 스스로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와 있는 것이다.


360

미국의 어느 저명한 인사는 몇 년 전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쟁은 결국 강철로 치러지는 것이지요. 무기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결국 현대전에서 그 핵심은 강철입니다. 프랑스는 유럽의 강철을 손에 넣었고 독일은 잃은 것입니다. 군사적 우위의 수명도 어느 정도는 여기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미래의 전쟁도 강철의 싸움이 되리라고 자신할 수 있소?" 하고 나는 되물었다. 그로부터 몇 주일 후 나는 어느 독일인과의 대하에서 "알루미늄은 어떻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몇몇 사람들은 다음 전쟁은 전기의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요."


364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 닥칠 폭풍우에 맞서, 국제연맹이 희미하나마 성실하게 건전한 정신과 희망의 빛을 내뿜는 이성의 심지를 돋우고 있다. 현재로서는 아직 실체도 없고, 찬란한 빛으로 포장은 하였지만 때로는 너무 이상주의로 흐르기도 하는 국제연맹이, 비록 지금은 미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는 조롱을 당하고, 이탈리아로부터는 경멸을, 프랑스와 독일로부터는 똑같이 불신의 눈총을 받고 있으며, 지금 당장 세계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인류를 재앙에서 구원하고 안전한 길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현재로선 국제연맹 이외에는 없다. 국제연맹을 지탱하고 돕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의무다. 우리가 대전을 치르면서 겪었던 고통과 재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재앙으로부터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대국들과 앞서가는 민족들 사이에 상호이해와 진솔한 협약을 통해서 국제연맹의 이상이 현실정치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이다.


377

현대국가의 사령관들은 신체적인 조건에서 전쟁이 암시하는 영웅다운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한니발이나 시저, 튀란, 말버러, 프레데릭 대왕, 나폴레옹과 같은 사령관들이 안장 위에 올라 앉아 새벽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전장을 누비면서 진두지휘하며 호령하는 모습을 앞으로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명성을 듣고, 전쟁에 나선 모습만 보고도 병사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하고 사기를 북돋워주며 위로해주는 모습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은 더 이상 전장에 있지 않다. 깃털장식과 깃발, 갑옷과 함께 그들은 전장으로부터 사라져갔다. 적진을 꿰뚫는 매서운 눈매, 전투의 긴장을 다 녹여낼 듯한 결의, 등장만으로도 전세를 뒤엎을 정도로 기세를 몰고 다니는 용맹무쌍한 전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대신 전투 당일, 전선으로부터 80-9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전세계로부터 날아드는 소식을 전해주는 전화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현대의 우리 장군들의 모습은, 시장 혼란기에 대규모의 투자자산을 주무르는 증권 투자자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곳 말고 어디에 가 있을 것인가? 시세 표시기의 붉은색은, 어느 철도가 끊기고 어디에 전기가 가설되었으며, 이쪽에 있는 둑이 무너지고 저쪽의 많은 장비가 포획당했다고 끊임없이 새로운 전선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장군은 고요히 앉아 있다. 그는 고상한 정신을 소유한 투자가다. 그는 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시장 붕괴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경력이 있는 노련한 투자가다. 그에게는 충분한 자원과 기동력이 받쳐주고 있다. 그는 최적의 공격 순간을, 때로는 공격 날짜를 -왜냐하면 요즘의 전쟁은 몇 개월씩 걸리니까- 재고 있는 중이다. 그는 정교한 전술가로서 '팔자'와 '사자'의 책략과 공격, 방어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안다. 드디어 단호한 결정이 내려지면, 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진다. 이쪽에 있는 병력 50,000을 팔고, 시장에서 저쪽 병력 100,000을 사자. 아차!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그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주식이 아니고 수십만의 인명인 것이다.

그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지금, 나폴레옹이 이끌던 군대보다 열 배는 많은 병력에 백 배나 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전투중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업무를 멋지게 처리했을 때, 정확한 지시를 내리고 가장 적합한 군대를 파견하고 최적의 진지를 확보했을 때 아낌없이 칭송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영웅이라는 느낌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는 결코 영웅이 아니다. 그는 주식시장이나 가축시장의 유능한 매니저일 뿐이다.

전쟁에서 개인적인 요소를 말살시킨 일, 지위 높은 사령관들로부터 전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극적인 요소를 배제시킨 일, 그들의 기능을 순수한 사무실 작업으로 끌어내린 일 등은 일반의 전쟁과 영웅에 관한 정서와 여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431

무릇 진정으로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려면 적어도 두세 가지의 취미는 갖고 있어야 하며, 그것도 가식이 아닌 아주 진솔한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 "이런 취미를 가져보고 싶다"든지, "저런 것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둥 하며 허둥대봤자 쓸데없는 이야기이다. 그런 시도는 오히려 정신적인 긴장만을 더 가증시킬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업무와는 전혀 관련 없는 주제에 대해서 대단한 지식을 쌓지만, 실제로는 그것에서 아무런 이익이나 위안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별 소용이 없으며,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을 좋아해야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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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흔한 기분전환의 방법은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활하고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다. 사람들을 도서관을 찾으면 으레 공손해지기 마련이다. '약간의 책' -이것은 5,000권 미만의 책에 대한 몰리 경의 정의다- 은 안락한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며, 심지어 어떤 충족감마저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도서관에서 하루만 지내보면 그러한 감상적인 환상은 금방 깨지고 만다. 서가에서 이 책 저 책 꺼내어 훑어보다 보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해 온 갖가지 관심분야에 관한 엄청난 규모의 지식과 지혜의 무게에 짓눌려서, 너무나 왜소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에 대한 서글픈 자각과 더불어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자존심마저 말끔히 지워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생을 바치더라도 모두 맛보기는커녕, 감탄만 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방대한 양의 현인과 성자, 역사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들의 업적 앞에서, 삶의 기간이 짧다는 자각만이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멋진 이야기가, 그것도 아주 근사하게 표현된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는지 우리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원래의 질문이었다. "읽어라" 라는 대답이 질문자의 정신을 번득 들게 만든다. 이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만지기라도 해라. 쓰다듬고, 쳐다보기라도 하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거나 눈에 띄는 구절부터 읽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가 또 다음으로 넘어가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새로운 해도를 작성하는 기분이 되어보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책을 서가에 꽂는 습관을 키우고, 자신만의 구상을 가지고 서가를 정리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 책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책과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알고는 지내는 것이 좋다. 책이 당신 삶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알고 지낸다는 표시의 눈인사마저 거부하면서 살지는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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