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인간의 흑역사Humans

네다 2021. 9. 15. 12:04
728x90

인간의 흑역사Humans

톰 필립스 

윌북

 

162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요즘 '식민주의는 사실 좋은 것이었다'는 주장이 꽤 거세게 대두되고 있으니 한 번 따져보자. 그 주장을 간단히 말하면 피식민국이 받은 수혜, 즉 경제 근대화, 인프라 건설, 과학.의학적 지식 이전, 법치 개념 도입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수혜가 식민국의 횡포로 인한 피해보다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치장해 표현하건, 이는 결국 피식민국이 근본적을 '미개'했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자치할 능력도 없고, 진보를 도외시하고, 기술이 낙후되어 보유한 천연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햇다는 것. 바보들이 황금을 그냥 깔고 앉아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는 얘기다.

일단 그 주장은 식민화되기 이전 나라들의 상황에 대한 사실이 아닌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몇몇 나라가 역사상 어느 시점에 군사력이 일시적, 우발적으로 우월했다고 하여 그것이 '누가 누구를 다스려도 좋다'는 절대적 도덕률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류를 안고 잇다. 더군다나 그런 주장에는 무언의 전제가 깔려 있으니, 식민화가 되지 않았더라면 피식민국들이 정체 상태에 머물렀으리라는 것. 그리고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 말고는 나라 간에 과학적, 기술적 지식을 교류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민화를 겪지 않았더라면 그 나라들이 아직 1600년대쯤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절대 그랬을 리는 없다. 애초에 유럽이 기술 발달을 누리게 된 것도 국가 간 지식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부터 생각해보자. 물론 이는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증명할 수 없는 문제로, 식민국도 아니었고 피식민국도 아니었던 나라가 거의 없어서 검증이 어렵다. 거의 유일한 예로 태국이 있긴 하다. 지금 구글에서 찾아보니 태국에도 전기가 잘 들어온다. 그러니 표본 한 개만 놓고 볼 때 일단 그 주장은 개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건 결국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어떤 행동을 하고 나서 수백 년 후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편익 분석을 한다? 그게 어디 인간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던가. 그건 자기가 믿고 싶은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한 사후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 보니 식민주의에 관한 토론은 한 사람이 "하지만 철도는 어떻고!" 하면 또 한 사람이 "그래, 하지만 암리차르 학살 사건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끝이 나지 않고, 그러다가 다들 지쳐 포기하고 만다. (그래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자. 철도가 학살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필자는 열렬한 철도 애호가이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정말 식민 지배 덕분에 피식민국이 통치 체제를 개혁하고 법치를 중시하게 되었는가? 그 얘기는 제국주의 열강과 원주민들 사이에 맺어진 수많은 조약의 역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 역사는 '법치의 존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니까. 그 얘기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가서 해보라. 영국, 미국 정부와 수백건의 조약을 맺었지만 모두 파기당하고 땅을 빼앗긴 그들 말이다. 그 얘기를 영국과 와이탕이 조약을 맺은 마오리족에게 가서 해보라. 영어와 마오리어 사이의 갖은 번역 문제로 합의 내용의 모호성을 영국 측에서 편리한 구실로 이용할 수 있었던 그 조약 말이다. 그 얘기를 남아프리카의 영국령 카프라리아에 살던 코사족에게 가서 해보라. 1847년 새로 부임한 총독 헨리 스미스 경이 자기들 앞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평화 조약서를 보란 듯이 찢어버리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지도자들이 1명씩 앞으로 나가 총독의 군화에 입을 맞추어야 했던 그들 말이다.

 

165

제국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현재를 신화화하고 그 과거를 윤색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부조화는 처음부터 역력했다. 콜럼버스는 타이노족이 다스리기에 적합할지 가늠해보고 있던 그 시기에도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또 영국은 제국 말기에 아프리카에서 철구하면서 자신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관련 기록 수만 건을 파기했다. 역사를 말소하고 집단적 기억상실을 꾀하고자 자료를 말 그대로 깡그리 불태우고 바다에 집어던졌다.(영국은 이 작전에 '유산작전Operation Legacy'이라는 적절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조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식민 시대를 통틀어 가장 가공할 만행으로 꼽을 만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수탈이다. 레오폴드는 200만 제곱킬로미터를 훌쩍 넘는 방대한 콩고 분지를 사들여 사유지로 삼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며 실로 잔학한 대량 학살을 저질렀고, 그 결과 20여 년간 약 1,0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짜 오싹한 아이러니는, 이 악행이 공식적으로는 자선 명목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콩코는 1885년에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레오폴드가 설립한 자선단체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베를린 회담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고, 그 회담의 목적은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자기들까지 나눠 갖는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을 추진해 아프리카 대륙을 철저히 식민화하는 것이었다. 국제 아프리카 협회가 표방한 자선사업은 콩고 주민들의 '문명화'였다. 

 

239

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세계보건기구는 납중독 관련 질환으로 인한 전 세계 연간 사망자 수를 수십만 명으로 추산한다. 납은 신체적 질환을 일으킬 뿐 아니라 아동의 신경계 발달에 피해를 끼친다. 이로 인해 집단적 IQ 저하를 유발하며, 전 세계적으로 지적.발달 장애의 12퍼센트를 유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납은 또한 반사회적 행동 등의 행동 문제도 유발하므로, 토머스 미즐리가 세상에 남긴 파장은 보다 더 소름끼치는 수준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주장은 현재까지는 입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러나 여러 연구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나타난 범죄율의 엄청난 급증은 납오염의 증가 추세를 거의 비슷하게 따르고 있다. 

지금가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비행 청소년, 도심 우범지대, 90년대 유행어인 초포식자super-predators 등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과거의 높은 범죄율은, 사실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반짝한 후 이제는 (아마도) 지나간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런데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각기 다른 수많은 나라에서, 범죄율이 치솟기 시작한 시점이 어째 다 유연휘발유가 그곳에 도입되고 약 20년 후부터다. 다시 말해 최초로 유연 휘발유에 다량 노출된 아이들이 10대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그리고 상관관계는 반대 방향으로도 나타난다. 최근 수십 년간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그 나라의 사회 정책에 관계 없이 강력 범죄가 꾸준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각 지역마다 범죄율이 하락세로 접어든 시점은, 그 지역에서 유연 휘발유를 금지하고 나서 하나같이 약 20년 후인 듯하다. 더 일찍 금지한 곳일수록 더 일찍 범죄율이 하락했고, 갑작스럽게 금지한 곳은 서서히 퇴출한 곳보다 더 급속히 하락했다.

미즐리 본인은 유연 휘발유를 발명하고 나서 그 일을 계속 하지는 않았다. 늘 이것저것을 궁리해야 직성이 풀리던 그는 곧 다른 연구분야로 관심을 옮겼다. 아직도 파국적 실수를 저지를 게 하나 더 남아 있었다.

 

242

염화이불화메탄CCl2F2이었다. 오늘날은 그 상표명인 '프레온'으로 더 잘 알려진 물질이다.

... 불행히도 1930년대 초에는 '오존층'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성층권에 오존이라는 산소 분자가 얇은 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그것이 해로운 태양 자외선을 지표면에 도달하지 않게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지상에서는 무해한 CFC가 대기층 상부로 올라가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CFC가 강한 자외선을 받으면 개별 원소로 쪼개지고, 그중 한 원소인 염소가 오존을 파괴해 지구의 보호막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희소식이라면, 이번에 인류는 대규모 인명 피해가 일어나기 전에 문제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야호! 인간이 한 건 햇다! 1970년대 유연 휘발유 퇴출 운동이 막 벌어지기 시작할 무렵, 오존층에 구멍이 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원인이 CFC인 것도 밝혀졌다. 그리고 인간은 깨달았다. 오존층 파괴가 현재 속도로 계속된다면, 인간은 해로운 자외선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될 것이며, 수십 년 안으로 암과 시력 상실 환자가 치솟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세계는 토머스 미즐리가 남긴 유산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두 주요 발명품이 모두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금지되거나 퇴출되었다. 환경 속에 이미 엄청난 양으로 퍼진 납은 현재 그대로다. 납은 분해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제거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적어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예전처럼 납을 많이 들이마시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혈중 납 농도가 이제 대부분 중독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세다. 한편 오존층은 CFC가 널리 금지된 이후로 서서히 회복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별 문제 없으면, 오존층이 미즐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시점은 아마도, 음, 2050년쯤일 것으로 보인다. 인류 파이팅!

어쨌거나 미즐리는 확고한 명성을 남겼다. <뉴 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그는 '그 자체가 환경 재앙이 된 인간'이었다. 역사학자 J.R.맥닐은 저서 <20세기 환경의 역사Something New Under the Sun>에서 그를 '지구 역사상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생명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그가 현대 세계의 모습을 예기치 못한 여러 면으로 바꾸어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노킹 방지 연료의 보급으로 자동차는 세계적으로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지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강력히 드러내는 심볼 역할을 하게 되었다. CFC는 우리가 집에서 쓰는 냉장고뿐 아니라 에어컨이란 물건을 가능하게 했으니, 그것이 없었더라면 세계의 대도시들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두 발명품은 서로 결합해 시너지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강력한 파워의 자동차와 차량용 에어컨이 결합하면서, 일상적인 장거리 운전이 어렵지 않고 즐겁기까지 한 일이 되었다. 예컨대 광활한 미국 서부와 중동 지역 대부분의 땅만 생각해보아도,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이 없었다면 세상의 모습은 아마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또 문화 전반적으로도 파급 효과가 있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영화관이나 냉방 시설을 초창기부터 도입한 덕분에 대공황 시절 여가 활동으로 영화가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영화 산업은 황금기를 맞으며 문화적 영향력을 굳혔고 실로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엔터네인먼트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토머스 미즐리는 LA를 통째로 발명해낸 것이다. 자동차와 에어컨으로 돌아가는 도시, 영화 산업의 중심지 LA 말이다.

 

255

1871년,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의 공장이 그대의 의회보다 전쟁을 더 일찍 종식시킬 것이오. 어느 군대든 적군을 삽시간에 섬멸할 수 있게 되는 날, 모든 문명국가는 엄습하는 공포감에 군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노벨보다 몇 년 뒤인 1877년, 개틀링 건(최초의 기관총)을 발명한 리처드 개틀링은 자신의 발명이 인도적 전쟁의 시대를 열 줄 알았다고 편지에 적었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의 발명 동기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날이면 날마다 군인들이 전장으로 떠나고 다니고 병들고 죽어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고 (...) 이런 생각이 들었네. 내가 만약 어떤 기계를(즉 속사가 가능한 총을) 발명해 전장에서 군인 1명이 100명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꼭 큰 군대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전투와 질병을 겪을 일이 크게 줄어들지 않겠는가."

같은 1877년, 웨스턴 유니온사의 칼 오턴 사장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자신의 전화기 특허를 팔겠다고 제안하자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가 이런 장난감을 어디에다 쓰겠소?"

1897년, 저명한 영국 과학자 켈빈 경은 "무선통신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같은 1897년, <뉴욕 타임스>는 하이럼 맥심이 발명한 맥심 건(최초의 자동 발사 기관총)을 가리켜,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전쟁을 막는 역할을 할 것이라며 칭찬했다. 맥심 건을 "평화를 불러오고 유지하는 공포의 대상"이라 일컬으며, "그 가공할 파괴력 덕분에 각국 통치자들은 정복 사업을 벌이기 전에 전쟁이 가져올 결과를 더 신중히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1902년, 저명한 영국 과학자 켈빈 경은 또 인터뷰에서, 대서양 횡단 비행은 불가능하며 "기구나 비행기란 것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라고 못 박았다. 18개월 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에 성공했다. 동생 오빌 라이트는 1917년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형과 내가 최초의 유인 동력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 발명품으로 세상에서 전쟁이 사실상 사라질 줄 알았네. 우리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프랑스 평화협회에서도 우리 발명을 치하하는 상패를 주었다네."

1908년, 토머스 셀프리지 중위는 오빌 라이트가 조종하는 비행기의 시험 비행에 동승했다. 버지니아주 포트 마이어 기지에서 이륙해 활주로 주변을 다섯 바퀴째 돌던 중, 프로펠러가 부서지면서 비행기가 추락했고, 셀프리지는 숨졌다.(오빌은 목숨을 건졌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비행기 추락 사고 사망자가 되었다.

1912년, 무선통신의 발명자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무선 시대의 도래와 함께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무선 기술은 전쟁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1914년, 세계는 전쟁에 돌입했다.

1929년 10월 16일, 저명한 예일대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주가가 영구히 지속될 고원 지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8일 후, 손쉬운 대출 관행이 재촉한 투기 거품이 마침내 꺼지면서 전 세계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경제 불황이 전 세계적으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금융 위기 이후 많은 민주국가에서 대중 영합적, 권위주의적 정치인들이 부상했다.

1932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핵에너지를) 장차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볼 만한 근거는 조금도 없다."라고 했다.

1938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아돌프 히틀러와 협정을 맺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시대에 평화가 왔다고 믿습니다. (...) 집에 가서 발 뻗고 주무십시오." 1939년, 세계는 전쟁에 돌입했다.

1945년,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이끈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기가 인류에게 전쟁 종식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과학 발명품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

1977년, 디지털이큅먼트코퍼레이션DEC사의 켄 올슨 사장은 컴퓨터 사업은 영원히 틈새시장에 불과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개인이 가정에 컴퓨터를 들여놓을 이유가 전혀 없다."

2007년 12월, 금융분석가 래리 커들로는 <내셔널 리뷰>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경기침체는 오지 않는다. 비관론자들은 틀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2007년 12월, 미국 경제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2008년, 손쉬운 대출 관행이 재촉한 투기 거품이 마침내 꺼지면서 전 세계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경기 침체가 전 세계적으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금융 위기 이후 많은 민주국가에서 대중 영합적, 권위주의적 정치인들이 부상했다.

2016년 8월, 시베리아 야말반도에서 순록을 모는 유목민들 사이에 탄저병이 돌아, 12세 소년 1명이 죽고 최소 20명 이상이 입원했다. 이 지역에서 75년 만에 처음으로 발생한 탄저병이었다. 이 무렵 이 지역의 기온은 여름철 이상고온현상으로 평년보다 25도까지 더 올라갔다. 시베리아를 덮었던 영구동토가 폭염에 녹으면서 수십 년 전에 형성되었던 얼음층이 차츰 드러났고, 그 속에서 1941년 마지막 탄저병 유행 때 죽은 순록들의 사체가 노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