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구단만 선수들과 같은 호텔에 숙소를 잡고 밤에도 선수들의 동향을 살폈어요. 그러다 보니 선수들이 밤에 술을 먹으러 다니는지, 개인훈련을 하는지 다 알수가 있었지요. 그러다가 밤 늦은 시간에도 혼자 스윙훈련을 하던 선수를 보게 됐죠. 그리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니어 펠릭스 같은 선수는 실력은 더 나아 보였지만 야구에 대한 절박함이 없었던 것과 달리, 나이도 있고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꼭 성공해서 돈을 벌고 새로운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는 선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선수를 지명했지요." -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당시 OB 베어스 스카우트 팀장)
2.
막상 시즌으로 들어가자 이대진은 상대팀 에이스들을 줄줄이 무릎 꿇리며 곧장 10승 투수가 되었고, 게다가 전구단 상대 승리투수가 되며 대성의 싹을 보이게 되었다.
1999년에 어깨부상으로 이탈했다가 재활훈련을 통해 이듬해 복귀하지만, 때이른 무리 탓에 더 악화된 어깨를 결국 수술해야 했던 이대진은 2001년 1군 무대에서 단 한개의 공도 던지지 못한 채 잊혀져가고 있었다. 절친했던 후배 故김상진을 떠나보내고, 그 몫까지 감당하겠다면 故김상진의 배번까지 물려받고도 반복되고 악화되는 부상때문에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이대진의 가슴은 더 깊은 곳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타자 전향한 이대진은 비록 10여 년간 녹슬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재능을 머지않아 뿜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타자로서의 경력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대진은 2003년에 다시 투수훈련장으로 돌아왔고, 그뒤로도 짧지 않은 재활의 일정을 다시 시작했다.
2007년 4월 7일, 잠실 개막전 마운드에 기아 타이거즈의 선발투수 이대진이 등판했다. 그리고 그가 마운드에서 선 순간 3루쪽 관중석에서 문득 3천 개의 노란 종이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길고 긴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과 끝내 좌절하지 않고 싸워 이겨낸, 그리고 돌아와 준 에이스에 대한 팬들의 아름다운 환영 의식이었다.
"막 공을 던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종이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걸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정말 투수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대진
"당신이 수없이 상처입고 방황하고 실패한 저를 언제나 응원할 것을 알고 있어서 저는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 이대진의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인사글
3.
물론 김선빈이 그대로 타이거즈의 주전 유격수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9년 이적해온 자연스레 유격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선빈은 키가 작다는 막연한 것 외에, 평범한 뜬 공을 잡지 못한다는 특이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아 타이거즈 때문에 산다
김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