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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류시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핀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 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가난한 사랑이란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돈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것, 배가 고파도 손만 잡으면 좋은 것,
바깥의 질문에 아랑곳 않고 눈과 귀를 한구석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어떤것인지 나는 모른다.
죽기 전에 가장 좋았던 사랑이 언제냐고 묻는 질문에 대답할 거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니 걱정은 필요 없다.
다만, 힘든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는 구석에 흠집이 날까봐 두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