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5 흐림
맨체스터
리버풀에서 고속버스 National Express 를 타고 맨체스터에 왔다. 1745 버스를 타려고 했었는데, 한눈을 팔다가 시간을 놓쳐 어쩔 수 없이 1825 버스를 탔다. 원래 민박집에 2000 전까지 도착할테니 저녁 좀 달라고 했었는데, 1825 버스를 탄다면 2000 까지는 무리일터였다. 숙소에 전화를 걸어 어찌어찌 하다보니 좀 늦겠다고 했더니, 사장님께서 걱정말고 오라신다. 다행이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친구들과 민박집에 가면 한식을 먹을 수 있다, 흥분된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계시던 휠체어를 타고 좀 뚱뚱하신 아저씨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아저씨 :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동아시아권에서는 자녀교육discipline 이 강하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갑자기 왜 이 말씀을 하신건지 분위기상 좀 이해가 안됐음.)
나 : 자녀교육이란 처벌punishment과 체벌spanking을 말하는 것이냐? 내가 자랄 때 우리나라에서 자녀교육은 엄했다.
아저씨 : 어머니와 아버지중 누가 더 엄한 역할을 하느냐?
나 : 때에 따라 다르다. 사람마다, 부모의 성격에 따라 다를 때도 있다. 정해져 있지 않다.
아저씨 : 체벌할때 어느부위를 때리느냐?
나 : 손바닥을 때린다.
아저씨 :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사실이냐?
나 : (대화가 왜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동아시아가 약간 아동학대 분위기로 비춰지나?) 설마, 그런것은 잘 못봤다.
이상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버스가 떠나는 것 같아, 죄송하다고 외치고 뛰어나왔다. 하지만 떠난 버스는 아니고 바로 옆에 있던 버스라서 그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50분 정도 지나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버스가 맨체스터에 처음 들어갈때는 고가도로를 타고 들어가는데, 마치 해리포터에서 비행하는 자동차를 타고 호그와트로 날아가는 기분이다. 가까이에는 100년은 된 건물이 보이고 멀리는 최신 건물이 보인다. 맨체스터 대학교 건물끼리 이어진 터널 밑으로 지나가는데, 과거인 것 같기도 하고, 미래인 것 같기도 하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오늘 트램이 운행하지 않는다는 민박(맨체스터 로얄민박) 사장님의 말씀에 따라, 바로 택시를 탔다. 그런데 맨 첫자리에 웬 밴 정도 크기의 택시가 있길래, 비쌀것 같아 다음 택시를 기다렸다 타려고 했더니 앞에 있는 택시를 타란다. 그래서 밴 택세에 오르면서 "이거 더 비싼 것 아니에요?" 소리쳤더니, 비싸지 않단다. 크기만 보고 판단해서 조금 창피했지만, 기사아저씨가 친절하신 덕분에 금방 무마되었다. 주소를 불러드렸는데, 기사아저씨가 그 주소는 이 곳 인근에 6군데가 있단다. 나는 우편번호를 안 찍어와서 당황했지만, 이내 구글맵 다운 받은 것을 보여드려 아저씨가 파악하셨다. 지나가는길에 올드트래포드 구장이 보여, "와 맨유 축구장이다!" 하고 말했더니, 기사아저씨꼐서 "응 그 유명한 맨유." 라고 추임새를 넣어주셨다. 역시 친절한 아저씨 짱짱맨!! 내가 "오늘 경기 있어요?" 물었더니, 아저씨께서 "뉴캐슬 원정이야." 라고 하셔서 '아 맞다. 표 찾아볼때 봤었는데.' 하고 새삼 나의 건망증에 혀를 끌끌 찼다. 아저씨께서 친절하게 민박집 앞에서 내려주셨고, 11.8파운드가 나와서 내가 20파운드 짜리를 드렸더니, 8파운드를 주시면서, "아가씨들 20펜스는 필요하지 않지?" 하고 그냥 가버리셨다. 350원;;
혹시나 잘못 찾아왔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민박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사장님께서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셔서 긴장이 싹 다 풀렸다. 밖에서 본 것도 예뻤지만, 안에 들어가니 전형적인 영국 2층주택에 영국식 소품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인테리어가 눈에 딱 들어왔다. '성공이다!!' 외국인 친구들을 데려오느라, 민박집에서는 불편해하고, 외국인 친구들은 실망할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완전 대성공이었다. 사장님께서는 친구들을 귀여워해주시고 친구들은 어디든 보는 족족 탄성을 질렀다. 침실은 고전적인 가구들과 꽃무늬 이불, 꽃그림 액자가 예뻤다. 주방은 여느 집보다 조금 넓었는데, 북유럽같이 가운데 아일랜드 식탁이 있고, 싱크대와 조리대의 길이도 길었다. 그리고 식당은 글라스하우스에 마련되어 있어 최고였다. 식당에서 뒷쪽 정원이 한눈에 보여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벽에는 티스푼을 모아 둔 액자, 시계 등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품들이 있었다. 클래식하되 빈티지한 가구들은 영국 시골?은 아니고, 작은 마을의 느낌을 한껏 높이고 있었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나와서 저녁을 먹었다. 닭볶음탕, 파전, 된장국을 메인으로 갖가지 밑반찬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먹고 모자라면 더 먹으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웃어넘겼는데, 정말 친구중 한명은 밥 2공기에 닭 2조각을 더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한식 정찬에 배가 든든해지는 배부름의 느낌을 가져보았다. 집에서는 많이 먹어도 헛배가 찰 뿐 포만감이 들지 않는데, 한식 정찬은 역시 느낌이 다르다. 점점 늙은 한국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렵다.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 씻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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