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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도서관
강기원
도서관이 사라졌다
익숙했던 내 의자가 없어졌다
빌려온 책들의 반납 기일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고백컨대
책을 읽는 대신 나는
그 도서관의 책들을 한 장씩 씹어 먹었다
젖을 먹어야 할 때 그림 형제의 삽화를
초경이 시작될 무렵 데미안의 알을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했을 때 사랑의 기술을
아무리 기다려도 피 다 마르지 않아
북회귀선의 금지된 선을, 위기의 여자를
자근자근 씹어 먹었다
그 낡은 도서관의 책들을
한 권씩 뽑아들 때마다
도서관의 갈빗대가 하나씩 뽑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책은 먹을수록 허기가 져 자꾸 먹어댔고
내가 뜯어 먹는 것이 피와 살덩이인 줄
그땐 정말 몰랐다
개정판 사전도 베스트셀러도 없던
사라진 말들의 유적지
폐관시간도 없이 모든 게 무료였던
나의 파라다이스, 책만큼이나 많은 돌무더기
나의 찬란한 폐허, 낡은 도서관 내 어머니
내가 파먹은 그의 부장품들
아직도 입 속에서 우물거리고만 있는
이 경전들은 어쩌라고
사라진 도서관 한 채가 관 속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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