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위안부 합의

네다 2016. 1. 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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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르디우스의 매듭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는 고르디우스의 전차가 있었고, 그 전차에는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매듭이 묶여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그 매듭을 풀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진부한 옛날이야기처럼 매듭을 푼 사람도 풀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곳을 지나다가 전설을 듣고 '내가 풀지' 하고서는 검으로 매듭을 끊어버렸다. 대담한 사고, 결단력, 발상의 전환을 독려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매듭을 잘라버리는 것이 진정 매듭을 푸는 것이었을까. 매듭을 잘 푼다면 다음에 밧줄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보존할 수 있다. 매듭을 끊어버리면 그 밧줄은 조각나서 더이상 사용할 수 없다. 매듭을 끊어버리는 것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은 될 수 있어도 그 제국을 천년만년 유지시키는 방법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역사문제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역사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체면, 이해관계, 의지 때문일 수도 있다. 한일정권이 위안부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은 해결할 방법이 의지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증언 수집, 치밀한 사실관계의 합의와 정리, 정확한 정황, 피해자와 가해자의 확인과 동의, 향후 배상계획 수립, 후대를 위한 교육의 방법 등을 합의하는데에 문서로 백페이지가 필요할지 천페이지가 필요할지 모른다. 한달이 걸릴지, 일년이 걸릴지 모른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명확한 전범을 재판하는데만 일년이 걸렸다. 예산이 십억이 들지 백억이 들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이제 끝!'이라고 해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쪽의 증언에 대해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99.9%이다. 일본인이 수십번 '사과'를 한다고 해서 '됐어 이제 그만 가봐' 할 한국인은 없다.

 

어느 정부든 이런 부담은 쉽게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사람과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지, 그만한 실익이 있을지 몰라서이다. 예산조차 태우기 힘들다.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이해관계자라며 튀어나올 수도 있고, 미궁과 진흙탕으로 전진할 수도 있다. 그랬을 것이다. 원래도 그랬었고, 정부가 뛰어들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서 정부는 선뜻 '해결하겠다!'고 외치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줄짜리 합의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그동안의 정부가 무능해서, 유약해서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세줄짜리 합의문이 해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들의 기억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그 누구도 '이건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우리의 기억은 이것으로 통일하고 앞으로 우리끼리 대화할 때 이렇게 해'라고 말할 수 없다. '너의 기억은 내가 돈 주고 샀으니 이제 그렇게 기억하지마' 라고 말할 수 없다.

 

역사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지만, 잘라버릴 수는 없는 매듭이다. 한쪽부터 조금씩 조금씩 타고 들어가야 하는 무한의 밧줄이다. 하지만 그 밧줄은 이제 잘려버렸다.어쩌면 필요했던 것은 총리의 '미안하다 유감이다' 대담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위안부문제를 매번 역사교재에 명시하고, 과거 전시 위안부시설터와 세계곳곳 재팬타운 혹은 코리아타운에 위안부 역사관을 설립하고, 위안부 증언집을 계속해서 발간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의 약속이었을 수도 있다. 한일 외교부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향후 어떻게 어떤 자료를 남길지, 피해자와 가해자를 어디에 어떻게 기록해둘지, 후대를 위한 교육자료를 어떻게 남길지, 어떻게 합의할지, 예산을 얼마나 태울지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일본정부가 주장하듯 '정부에 의한 조직적 범죄는 없었다'라는 변명을 어떻게 정리할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2. 막다른 골목의 한국, 미국과 일본의 승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 길을 안 찾은 한국이 15년을 보내며 막판에 이 한건은 해야겠다고 다짐했는지 일본과의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했다. 지난 몇년간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과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신밀월시대를 개시하였다. 영토분쟁과 과거사 문제에도, 서로때문에 안보가 불안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일본과 중국은 경제분야에서 필요하다면 오월동주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국을 등에 엎고 중국과의 아슬아슬한 긴장의 애증관계에서 줄타기 하면서 일본은 정상국가화 혹은 그 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북한과 더 담을 쌓고, 과거를 똑바로 보라고 일본을 몰아붙이고, 중국에 애매한 친한척을 하면서, 외교정책에서 가장 근본이 되었던 대미관계를 고사시켜 나가던 한국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는지 혹은 무계획의 발로였는지 뜬금없이 일본과 위안부 협상을 타결하겠다고 나선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합의문'이라는 결론을 내놨다. '역사문제'를 '합의한다'고?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지 친구끼리 약속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승자가 될 수 없었다면 링 위에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일본은 승자로 출전해서 승기를 올리며 전투를 끝냈다. 한국은 컨디션이 가장 취약해져 있을 때, 쓸 수 있는 전략이 가장 빈약할 때, 승기를 잡은 적을 만났다. 만나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안보상황을 고려해서 일본과 화해모드로 나갔어야 한다 해도, 위안부 카드를 꺼낸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천회를 넘은 수요집회가, 몇년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소녀상이 갑자기 무력시위와 동상귀신으로 바뀐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 중국하고는 요 정도로 친하게 해두고, 이제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협력해볼까.' 하고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이 굳이 풀릴리가 없는 위안부 문제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하고 그닥 친해진 것도 아니잖아. 마치 과장과 차장 사이에서 아슬아슬 라인의 행로를 모색하던 사원이 뜬금없이 대리에게 그가 눈독들이고 있던 필살기 보고서를 바친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했으니 천조국느님 우리 좀 제발 예쁘게 좀 봐주세요.


3. 나가사키 시장의 비극

 

1988.12.7. 일왕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가사키 공산당 지부는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Motoshima Hitoshi에게 질의했다. "황제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있는가?" 모토시마는 대답했다. "나는 황제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1988.12.8. 나가사키 시의회와 자민당(모토시마 소속당) 지부는 나가사키에게 그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1988.12.12. 모토시마 시장은 "양심을 속일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대신 그는 발언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자민당에서 탈퇴하겠다고 했다. 그의 사임은 반려되었다. 대신 그는 제명되었고, 자민당과의 향후 협조도 거부되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황제가 전적으로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일본정치의 현상황은 이상하다. 황제에 대한 어떠한 발언도 모두 감정문제로 치우쳐버린다. 발언의 자유는 시간과 장소를 상관하지 않고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공감하지 않는 의견이라 해도 존중해야 한다."

 

1988.12.19. 극우단체 회원 24명이 30대의 확성기트럭을 타고 나가사키 시내를 돌면서 모토시마의 자결, '신성한 포기'를 외쳤다. 자민당은 모토시마에 대한 도지사의 지원을 끊을 것을 지시했다. 도지사는 승낙했다.

 

1988.12.21. 극우단체 회원 62명이 82대의 확성기트럭을 타고 나가사키 시내를 돌면서 모토시마의 자결을 외쳤다.

 

1988.12.24. '나가사키 자유발언 시민연대'가 주도한 모토시마 시장의 발언을 지지하는 13,684명의 서명이 시청에 게재되었다. 단 2주만의 모집이었다. 나가사키 지역의 신사를 비롯해 우익진영으로부터 시장의 탄핵이 요구되었다.

 

1989.1.7. 일왕이 죽었다.

 

1989.1.18. 모토시마 시장은 저격당했다. 다행히 총알이 폐를 뚫고 지나가면서 가까스로 살았다. (모토시마 시장은 2014년 사망하였다.)

 

나가사키는 17세기부터 기독교 선교사와 네덜란드 상인들의 교류가 활발하여 일본에서도 가장 개방된 도시중 하나이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받고 순교했지만 여전히 뿌리깊은 기독교 문화가 살아있다. 모토시마 시장의 조부는 기독교인으로 압슬형을 받고 순교했다. 아마도 그는 예수냐, 황제냐 둘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모토시마 시장은 애초에 자민당 소속으로 과거 행적들을 보면 확실한 보수이다. 그의 고백을 보수진보의 틀에서 해석하기도 어렵다. 그의 고백은 일본전통문화와 상반되는 기독교의 고해Confess문화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저격당한 모토시마 시장에게도 우익은 예수냐, 황제냐 둘 사이에 선택을 강요했을 것이다. 그의 밑에서 일했던 한 시청직원은 모토시마의 발언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인 모두 진실을 알아요. 하지만 조용히 있어요."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고백과 용서를 통해 죄를 극복하는 서구 기독교식 문화와 달리 '자연'의 이치를 중시하는 일본전통문화에서 신의 눈에 옳지 않은 일에 용서를 구하는 것은 '체면'에 치욕을 입히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안 부루마 Ian Buruma, <Wages of Guilt: Memories of War in Germany and Japan> 참조


4. 위안부 소녀상,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을 마친 정부는 유네스코에 위안부 등재를 사실상 포기했다. 일본정부가 역사를 무마하지 않고 직시하려고 했다면 소녀상을 옮기라는 (암묵적이든 직접적이든) 요구, 유네스코 등재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정상국가라면 오히려 소녀상을 기념유적으로 지정했을 것이다. 소녀상과 유네스코 등재는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제는 거의 과학처럼 확고해졌다. 일본이 거북하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듣기 싫다고 해서 듣지 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막고 가리고 없앤다고 해서 역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아니, 집단의 기억은 없어질 수 있다. 소녀상을 없애고 10년이 흐르고,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잊혀질 것이다. 위안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있었던 '이해관계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위안부의 기억을 왜곡하고 희석하려는 일본의 노력이 점점 강화된다면 몇십년뒤에 위안부의 기억은 수증기처럼 기화될 것이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위안부 박물관을 지었다. 뜻깊은 이름 '서울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다. 2012년에 서울시 건축대상 최우수상도 수상했다. 앞으로 이 박물관이 체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굳이 일본에 지어지지는 않아도 된다. 대신 전세계 수많은 곳에 같은 이름을 가진 박물관이 생겨서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전쟁과 여성인권'에 대하여 배울수 있는 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5. 용어의 문제

 

'위안'이란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영어로 위안부는 comfort women, 성노예는 sex slaves라고 한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단체는 정신대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이는 성보다는 근로를 착취당했다는 점에서 위안부와는 차이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단체가 품어야 하는 대상이 실제로 근로까지 착취당해야 했던 조선의 소녀들로 더 넓어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점에서 sex slaves라고 호칭을 붙이기에는 송구스럽다. 위안부라는 단어는 가장 보편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사용한다. 완곡어법의 대가인 일본인(배려예산, 현자타임...)들이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군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치욕스럽다. 일본 제국주의에 이용당하고 세뇌당하고 농락당한 일본 병사들에게 '위안받았다'라고도 쓰기도 민망한 단어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할머니들은 '전시 성노예제의 희생자victims of sex slavery in war time'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에는 흑백논리가 적용된다. 가장 좋은 상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나쁜 상태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을때도 우리는 좀 더 좋음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모든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계층은 여성과 어린이이다. 전시에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자행되는 불법적, 비윤리적, 비인간적 만행들은 앞으로 인류가 살아가면서 쉬지 않고 처벌하고,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범죄이다. 전시에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고 하는 논리가 타당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전쟁에는 목표가 있고, 전략이 있다. 20세기 일어났던 어떤 전쟁도 다른 나라 여자를 (제도적이고 조직적으로) 강간하기 위해서 발생하지는 않았다. 전시에도 강간은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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