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의 조건 : 유럽은 어떻게 세계 패권을 손에 넣었는가
Why Did Europe Conquer the World?
필립 T. 호프먼Philip T. Hoffman / 이재만 / 김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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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근대 초기 서유럽 국가들이 추구하던 그야말로 유일한 목표였다.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위해 세금을 물리고 돈을 빌렸는지를 기준을 판단하면 그렇다. 사법과 궁정에 자금이 쓰이고 운송과 기근 구호에 소액이 할당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출 총액은 미미했다. 적어도 주요 열강에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들의 처소 가운데 가장 으리으리한 베르사유 궁전이 잡아먹은 금액만 해도 루이 14세의 세수에서 2퍼센트 이하였다. 반면에 정부 예산의 40-80퍼센트는 바로 군대에, 다시 말해 거의 끊이지 않고 싸운 육군과 해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데 쓰였다. 정부의 연간 지출에서 전비의 비중은 동맹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이전 전쟁의 부채를 상환하느라 지출한 총액을 더할 경우 더 올라갔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프로이센에서는 90퍼센트를 상회했다. 그 비중은 우리가 수치를 도표로 제시할 수 있는 기간 내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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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화약 기술의 혁신을 설명하고 유럽인이 왜 화약 기술을 다른 누구보다 멀리까지 밀고 나갔는지 이해하고자 한다. 이 주제에 관해 토너먼크 모델로 설명할 때 우리는 실행학습을 통해 화약 기술을 개선하는 데 필수적인 네 가지 조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전쟁이 잦아야 한다. 그러려면 통치자들이 자원을 동원하는 정치적 비용이 서로 비슷해야 하고, 재정 제도와 군사 기구를 수립하는 데 드는 고정비용에 견주어 상의 가치가 커야 한다. 그리고 나라 내지 경제의 규모, 차입 능력 등에서 통치자들 간의 격차가 크지 않아야 한다. 다만 작은 나라의 통치자가 신용에 의지해 더 큰 나라의 통치차와 싸울 수는 있다.
2. 그렇지만 잦은 전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통치자들은 전쟁에 거액을 써야 한다. 첫째 조건에서처럼 상이 귀중해야 하지만, 거기에 더해 자원 동원에 드는 통치자들의 정치적 비용이 서로 비슷해야할 뿐 아니라 절대 수준 자체가 낮아야 한다.
3. 통치자들이 더 오래된 다른 군사 기술들이 아니라 화약 기술을 중점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4. 통치자들이 군사 혁신을 채택할 때, 설령 적의 혁신을 채택할 경우일지라도 장애물이 거의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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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의 기술 우위는 세계사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 변화 이면의 궁극 원인들은 무엇이었는가? 토너먼트 모델은 서유럽의 독특한 특징들을 분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한다. 첫째, 서유럽은 그리 크지 않은 교전국들로 조각나 있었으며, 그 통치자들은 귀중한 상을 두고 싸우는 가운데 서로 비슷하면서도 낮은 정치적 비용으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서유럽에는 다른 강성한 통치자들을 겁박하여 무기를 거두게 할만한 패권자, 예컨대 동아시아의 중국 황제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서유럽 주요 강국들은 비교적 크기가 작고 서로 엇비슷했던 까닭에 실행학습을 수행하기가 수월했고, 또 정치적 비용을 서로 비슷하게, 고정비용은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정치적 파편화로 서유럽 통치자들은 유목민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이는 그들이 대부분의 전쟁을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으로 치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유럽 통치자들만히 영광과 신앙의 적에 대한 승리를 위해 싸웠던 것은 아니지만, 이 두가지 상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아주 중요했다. 영광을 얻고 종교의 적을 무찌른다는 것은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단념하고 전쟁을 이어간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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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가 예외적 사례였던 것도 아니다. 근대 초기에 군 복무는 흔한 일이어서, 피사로가 서유럽인을 무작위로 차출했더라도 그의 부하 178명 중에 전쟁으로 검증받은 참전 군인이 적어도 한 명은 포함될 확률이 99퍼센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인 대다수는 설령 군 복무 경험이 없었을지라도 화약 기술에 익숙했다. 민간인의 무기 소유를 막기에는 서유럽의 총기 규제 법률에 구멍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인근에서 총기 소유는 흔한 일이었고, 17세기경 프랑스의 농민들은 머스킷을 소유했으며, 도시 주민들은 축제 때면 머스킷을 발사했다. 화기는 17세기 잉글랜드에서도 널리 보급되었고, 지역의 평화유지활동에 이바지하리라 기대되는 사람이 제공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에서 화기소유를 제한하려던 시도는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689년 '권리장전'에 무기 소유권이 명시되었다. 마지막으로, 총기는 비싸지 않았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와 런던에서는 가난한 미숙련 날품팔이일지라도 2주나 3주치 임금으로 화승식 머스킷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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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몽골족이 정복하지 않은 세계는 실질적인 가능성이었다. 몽골 제국과 같은 제국을 만들어내려면 칭기즈칸처럼 카리스마 강한 불세출의 지도자가 필요했다. 게다가 몽골 제국은 하나의 전체로 융합된 뒤에도 불안정했고, 자칫 중국을 정복하기 전에 와해될 수도 있었다. 몽골 정복 이전인 13세기 초에 동아시아는 서로 적대하는 세 세력, 즉 서부의 서하, 북부의 금나라, 남부와 연안지대의 남송으로 쪼개져 군사적 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만일 몽골족이 이 균형상태를 깨뜨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른 어떤 유목민 거대 제국이 몽골 제국을 대신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계속 분열되었을테고, 남송은 계속 번성했을 것이다. 남송은 서하, 금나라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므로 상업세 제도와 해군의 발전에 계속 힘썼을 것이다. 일찍이 남송이 금나라의 침공을 견뎌내는 데 이바지했던 해군은 내륙 수로와 연안에 자리한 수도를 보호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번창하는 남송 도시들의 상인 엘리트층은 (서유럽의 상인들처럼) 십중팔구 강력한 원양 해군으로부터 자신들의 급성장하는 해외 무역을 보호해달라며 로비를 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화약은 10세기부터 군사용으로 쓰였다. 남송과 금나라는 교전 중에 서로에게 화약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화약 폭탄과 근대 총기의 조상인, 최초의 화창이 될 가능성이 있는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몽골에 정복당하지 않았다면, 남송과 그 적수들은 화약 기술 개발을 더 오랫동안, 실제로 몽골족과 싸운 남송보다 오랫동안 추진했을 것이다. 몽골족이 중국을 장악한 직후에 최초의 총포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몽골족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자가 되자 화약 기술을 혁신할 유인이 약해졌다. 그에 반해 남송과 그 적수들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패권자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토너먼트 모델에 다르면 화약기술이 더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군사 면에서 남송은 유럽의 잣대로 보면 대국이었을 것이고, 유목민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남송은 화약 기술에 주력하지 못하고 오스만과 러시아처럼 유목민에게 대처하는 기존 수단과 화약 기술에 자원을 나누어 써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송은 패권자는 아니었을 테고, 상당한 상업세를 바탕으로 자금ㅇ르 더 많이 지출하여 명나라나 청나라보다 화약 기술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들 역시 (분명 언제나 패권자는 아니었지만) 대개 패권자였으므로 화약 기술 개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송 상인들이 해외에서 해상 무역 거점을 한결 쉽게 건설했을 것이므로, 남송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비록 서유럽에 줄곧 뒤지긴 했지만 서유럽에서 최신 기술을 매입하는 데 어려움을 덜 겪었을 것이다.
결국 남송은 1800년경까지 실제보다 훨씬 강한 국가가 되어 19세기에 유럽인과 일본인을 물리쳤거나, 적어도 한결 대등하게 교섭했을 것이다. 또한 자국민을 훨씬 안전하게 보호했을 것이다. 중국이 산업화도 더 빨리 진척시켰을까? 해상 무역이 산업화를 촉진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야 있지만, 남송처럼 큰 나라에 이렇다할 영향을 미치기에는 해상 무역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게다가 에너지 비용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중국에는 영국에서와 같은 값싼 석탄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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