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The High Mountains of Portugal

네다 2018. 2. 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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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The High Mountains of Portugal

얀 마텔Yann Martel / 공경희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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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세기부터 이교도 저자들은 수백가지의 문건을 남겼어요. 예수는 어느 문건에서도 언급되지 않아요. 어느 로마인도 -관료, 장군, 행정가, 역사가, 철학자, 시인, 과학자, 상인, 어떤 부류의 작가도- 그를 언급하지 않아요. 공적인 비문이나 현존하는 개인 서신들 어디에서도 예수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도 없었어요. 게다가 그는 출생증명서도, 재판 기록도, 사망증명서도 남기지 않았죠. 그가 사망하고 1세기 뒤에나 -100년이 지나서!- 이교도에 의해 단 두차례 언급되었을 뿐이죠. 한 사람은 로마의 상원의원이자 작가인 소 플리니우스, 다른 한 사람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요. 편지 한 통과 몇 페이지 -제국의 열정적인 관료들과 자부심 강한 행정가들에게 나온 언급은 그게 전부에요. 제국의 다음 종교가 예수에 토대를 두고, 수도는 예수의 찬미자들의 수도가 될 텐데도 말이죠. 이교도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에서 기독교인으로 바꿀 이 인물을 눈여겨 보지 않았어요. 프랑스인들이 프랑스혁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일이에요.

...아니, 아니, 아니요. 역사적인 기록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인간 예수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전부 네 명의 우화작가에게서 나왔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이야기의 음유시인들이 예수를 한 번도 만난적이 없다는 점이에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은 아니었죠.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예수가 세상을 거쳐 가고 세월이 흐른 뒤에 그에 대해 썼어요. 그들은 수십년간 돌고 돌아 구전된 이야기들은 기록하고 정리한, 영이 충만한 필경사들이었지요. 그제야 주로 입으로 전해져 살아남은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온 거에요. 한 사람의 자취가 우연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역사에 남은 거죠.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수가 그런 방식이기를 바란 것 같다는 점이에요. 유대인들은 글을 읽고 쓰는 데 집착해요. 유대인의 손가락은 펜이죠. 신은 우리 비유대인들에게는 단순히 말하시는 반면, 유대인들은 글이 새겨진 석판들을 받았어요. 그런데 여기 글로 적힌 말보다 바람을 선호했던 중요한 유대인이 있었어요. 그는 기록된 사실보다 소용돌이치는 구전 설화를 택했어요. 왜 이런 식의 접근을 했을까요? 왜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막강한 군사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왜 역사를 창조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하는 쪽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다시 한번 예수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야기가 혼례식이라면, 우리 듣는 이들은 통로를 걸어 들어오는 신부를 지켜보는 신랑이죠. 상상의 완성이라는 행위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에요. 여느 결혼이 그렇듯, 또 결혼이 제각기 다르듯 이 행위는 우리와 관련되고, 그래서 각자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느끼죠.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든 이야기는 우리 개개인에게 찾아와요 -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죠.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에 은혜를 베풀어요. 예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감동시키는 한, 우리의 놀라운 상상력에 지문을 남기는 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우리 역시 그와 함께할 것이라고 차분히 확신하면서 세상을 거닐었어요. 그리고 그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이야기를 타고 왔지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으로 그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 기차가 동양에서 어떻게 오는지 깨달았죠. 이야기의 핵심부에는 승객이 13명 있고 그 중 한명은 괴물, 유다같은 인물이죠. 이 승객들이 얼마나 각계각층의 인물이며, 다양한 국적 출신인지 알겠더라고요. 조사관 중 한 명인 에르퀼 푸아로를 돕는 사람이 닥터 콘스탄틴이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죠. 예수의 이야기는 다른 콘스탄틴에 의해 인기를 얻은 동양의 이야기 아닌가요? 예수는 열두 제자를 두었고 그중 유다가 있지 않았나요? 팔레스타인은 국적이 뒤섞인 '오리엔트 특급'이 아니었나요? 에르퀼 푸아로의 이질성은 자주 언급되죠. 그는 반복해서 곤경에서 벗어나요. 이 외국인이 개입해서 상황이 해결되죠 -그게 예수를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이 아닌가요? 이런 깨달음들은 나로 하여금 애거서 크리스티의 살인 사건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살피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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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런 묘한 현상이 있죠. 우린 강박에 사로잡혀서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어요. 우리는 기필코 계속 읽어야 해요. 우린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죠. 우리는 범죄 실행의 복잡성에 놀라요. 아, 살인범의 냉철한 정신, 단호한 손길, 호기심을 충족시킨 뒤에는 책을 내려놓고- 그리고- 그리고 곧 누가 그일을 벌였는지 잊어버리죠! 그렇지 않나요? 누가 피해자인지는 잊어버리지 않아요. 애거서 크리스티는 소설의 제목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나 <에지웨어 경의 죽음>이라고 짓고도 독자들이 흥미를 잃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죠. 피해자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그 사람은 우리 곁에 있어요. 하지만 살인자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빨리 사라지나요. 우리는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집어 들고 -그녀의 작품은 정말 많아요- 궁금해해요. 내가 이 책을 읽었던가? 어디보자. 그 여자가 피해자네. 맞아. 그건 기억나는데 범인이 누구였더라? 이런. 기억을 못하겠는걸. 100페이지쯤 다시 읽은 후에야 누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기억하곤 하죠.

복음서를 읽을 때도 똑같은 기억상실증을 겪어요. 우리는 피해자는 기억해요. 당연히 기억하고말고요. 하지만 그분을 죽인 자를 기억하나요? 거리의 행인에게 다가가서 '빨리 대답해봐요. 누가 예수를 죽였나요?'라고 물으면, 아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맬걸요. 누가 나사렛 예수를 살해했는가? 누구의 책임이었는가? 이스가리옷 유다? 쳇! 그는 도구이자 종범에 불과했어요. 예수를 배반했고, 예수를 찾는 자들에게 넘겨주긴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지요. 그러면 로마 행정장관 본디오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했나요? 천만에요. 빌라도는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는 예수가 어떤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어줄 방도를 강구했고, 바라바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싶었죠. 그런데 성난 군중을 맞닥뜨리자 굴복했을 뿐이에요. 빌라도는 폭동이 일어나는 꼴을 당하느니 무고한 이를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했지요. 그러니 그는 나약한 인간살인의 또 다른 종범이긴 해도 실제 살인범은 아니었어요.

그러면 누가 그 짓을 저질렀나요? 더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로마 병사들이 로마제국의 속주에서 로마법에 입각한 로마의 관례에 따라 예수를 매달아 죽였어요. 하지만 그런 막연한 살인범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오래전 사라진 제국의 이름 없는 하급 관료들이, 옥신각신하는 현지인들을 달래려고 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신학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다면 누구의 짓이었는지 아무도 기억 못하는 건 당연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