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2

네다 2018. 2. 1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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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주경철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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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이 바뀐 것은 1572년이었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바다의 거지들', 즉 에스파냐 선박을 공격하는 해적선들을 잉글랜드 항구에 정박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 봉기에 연루되는 걸 부담스러워한 엘리자베스 1세는 곧 이들을 항구에서 내쫓았다. 그런데 일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잉글랜드 항구에서 쫓겨난 이 선박들이 내친 김에 해협을 건너 그대로 홀란트 지방의 항구 도시인 덴 브릴을 공격해서 단번에 점령해버린 것이다. 이들이 차례로 네덜란드 해안을 해방시켜 나가는  동안 육상에서도 게릴라들이 반격을 가했다. 동시에 빌렘의 외교적 노력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동시에 에스파냐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알바 역시 홀란트와 제일란트 지역을 강하게 압박했고 여러 도시에서 에스파냐군에 의한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그 결과 지금까지 태도를 확실히 정하지 못했던 도시들도 완전히 에스파냐에 등을 돌리고 빌렘측과 손을 잡았다. 암스테르담만이 더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1578년에 최종적으로 빌렘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알테라치Altera'tie(대전환)라 부르는 이 사건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네덜란드를 힘으로 누르고 반란을 종식시키겠다는 알바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알바는 1573년에 에스파냐 본국을 소환되었다. 후임은 루이스 데 레쿠에센스 이 주니가였다.

1574년 빌렘의 동생 로더베이크Lodewijk와 헨드릭Hendrik이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패배하고 두 사람은 살해당했다. 레쿠에센스는 더욱 압박을 가하여 레이던시를 포위했다. 이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일명 80년 전쟁)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다. 만일 레이던을 빼앗기면 에스파냐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올 것이고, 그러면 홀란트와 제일란트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빌렘으로서는 어떻게든 레이던을 지켜내야만 했다. 어떤 작전을 구사할 것인가? 빌렘이 생각해낸 것은 도시에 바닷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상류의 제방을 무너뜨려서 수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레이던 일대가 파괴되어 시민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빌렘은 비밀 요원들과 메신저 비둘기들을 이용해 미리 시민들과 협상하여 차후에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1574년 8월부터 상류의 제방을 무너뜨려 바닷물이 레이던시 쪽으로 흘러넘치도록 했다.

10월 2일 밤, 에스파냐군은 레이던시를 버리고 퇴각했다.

10월 3일 아침, 시 당국과 군은 그동안 굶주렸던 시민들에게 청어와 흰 빵을 나누어 주었다. 에스파냐군이 떠난 뒤 성벽 가까운 곳에서 휫스폿hutspot(감자와 양파를 넣고 끓인 요리)이 가득 담긴 큰 솥을 찾아냈다. 시민들은 저녁에 이것을 먹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이후 레이던 시민들은 이 사건을 기념하여 매년 '레이던 온젯Leiden onzet'이라는 축제를 열어 사람들에게 휫스폿과 흰 빵과 청어를 나누어준다. 한편, 레이던 시민들의 희생정신에 대한 보상으로 빌렘 공은 시민들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시민들은 대학을 세워달라고 했다. 이것이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인 레이던 대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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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년 전국의회는 철회령 Act of Abjuration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각 주의 위원회가 주권을 가지며 주의 통치자는 주에서 부여한 권한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펠리페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연맹United Netherlands에 대한 충성서약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신민이 자기들끼리 협의하여 국왕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지배자가 아니니 우리의 충성을 철회하노라'고 선언한다는 것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들은 나중에 미국 독립선언의 본보기가 되었다. 미국이 독립할 때도 네덜란드의 상황과 유사했다. 각 주와 중앙정부의 관계, 지배국가(영국)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할 때 중요한 선례가 바로 네덜란드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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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비학 요소가 뚜렷한 사례는 오히려 갈릴레오보다 후대인물이며 근대 과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뉴턴이었다. 흔히 뉴턴 하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자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사실 그의 정신세계를 크게 지배했던 것은 연금술과 마법 같은 신비주의 학문들occult  sciences이었다. 예컨대 뉴턴은 성경에 나오는 수치들을 이용해 말세가 언제 찾아올지 계산하는 연구에 몰두했다(뉴턴의 연구에 따르면 2060년에 종말이 올 것이다!) 이와 연관된 뉴턴의 문서들을 발굴하고 연구한 중요한 학자 중 한 명이 경제학자 케인즈 였는데, 그는 '뉴턴은 이성 시대의 최초의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 마술사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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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문을 가하는 재판관들은 일말의 가책을 느꼈을까? 아니면 자신이 악마의 세력에 대항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지켜내는 정의로운 싸움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까? 당시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느님을 믿는 자가 악마의 존재를 믿는 것은 당연하다. 악마 없는 신이란 그림자 없는 존재처럼 성립하기 힘들다. 그럴진대 악마의 하수인들이 준동하여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러 할 때, 자신들은 악의 세력을 뿌리 뽑아 세상을 지켜내는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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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이 얼마나 극심하게 벌어지느냐 하는 것은 지배자들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17세기 초 밤베르크의 주교 지배자들은 확고한 신앙심과 비판적인 죄의식,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기 땅에서 죄를 말끔히 지우는 것을 신성한 사명으로 여겼다. 그래서 신성한 국토 수호를 저해하는 죄인들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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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왜 그토록 열심히 마녀와 마법사를 찾으러 다녀야 하지요? 이봐요 판사님들, 어디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은지 알려드리지요. 카푸친 수도회, 예수회 같은 곳에 가서 수사들을 죄다 잡아다가 고문하세요. 자백할 겁니다. 만일 부인하면 세 번, 네 번 고문하시면 자백할 겁니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퇴마 의식ㅇ르 하고 털을 미세요. 그들은 마법을 쓰는 중이니까요. 악마가 이 사람들을 고통에 둔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계속 하세요. 결국은 굴복할 겁니다. 더 많은 마녀를 원하시면 고위 성직자들, 교회법학자들, 박사들도 잡아들이세요. 그들도 자백할 겁니다. 그 가련하고 섬세한 인간들이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만일 더 원하신다면 제가 당신을 고문할테니 당신은 저를 고문하세요. 저는 당신이 저에 대해 자백한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이로써 우리 모두 마녀와 마법사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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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대군이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멀리 몸을 피한 레오폴트 왕제의 외교 덕분이었다. 적이 물러나고 끔찍한 포위가 풀린 뒤 살아남은 시민들이 성 바깥으로 나와 보니 오스만인들이 마시던 시커먼 음료가 있었는데, 이것이 비엔나커피의 유래라고 야사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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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는 신흥 부자들이 넘쳐났다. 푸주한, 빵가게 주인, 하녀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 4,000만 리브르를 번 굴뚝 청소부, 3,000만 리브르를 번 웨이터 같은 졸부의 레전드들이 탄생했다. 백만장자millionaire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주식거래소 역할을 했고, 가게 주인들이 중개인을 자처하며 주식거래를 수행했다. 의자나 헛간을 빌려주는 대가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주인이 8,000리브르에 팔고 오라는 심부름을 하던 하인이 도중에 1만 리브르에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2,000리브르를 챙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특히 유명한 것은 존 로의 마부 이야기다(가끔 화제가 되는 회장님 운전기사 이야기의 18세기 버전이다). 존 로가 하는 일을 어깨 너머로 보고 따라한 마부가 큰돈을 벌었다. 어느 날 그가 다른 마부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자신은 이제 은퇴할 테니 다른 마부를 쓰라는 것이었다. '알겠네만, 두 사람까지는 필요 없다네' 하고 존 로가 말하자 전직 마부가 답했다. '한 사람은 내 마부요'

남들은 떼돈을 번다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면 바보처럼 느껴지는 법. 시골에서 많은 사람이 파리로 상경하여 주식거래소로 달려갔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 함부르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사람들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루이지애나 회사를 소개하는 책이 대여섯 권이나 출간되었다. 버블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