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아작
177
"보세요. 이게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는 타오름을 멈춘 불 사이를 스치며 걸었다.
"만약 여기서 비원 사람을 마주치면, 난 내가 멈춘 불을 집어다 그 사람 입속에 넣고 능력을 풀 거에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불길은 그 사람과 목과 폐를 태우겠죠. 여기는 그런 사람이 지휘하는 곳이에요. 눈으로 봤으니, 직접 생각해서 결정하세요. 이런 데에서 도망치는 데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윤서리는 정지한 불 안에 들어가 섰다.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애써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거짓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거짓말하면서 여기 있을게."
속뜻을 알 리 없는 정여준은 걱정스러운 마음만으로 눈썹을 구겼다.
336
"두목으로서는 뭐 좋지. 인구가 한 명이라도 많은 편이 유리하잖아."
"...그러냐."
"그리고 그냥 인간 정여준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고."
"..."
"네가 비원 출신이든 산성 출신이든 무슨 상관이야. 우린 산성 출신이라서 같이 있는 게 아니라 싱크홀 출신이라서 함께하는 거야."
338
그는 당혹스러운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괜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정여준은 그녀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더니 멍하게 중얼거렸다.
"자꾸 이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당신이, 익숙하고 그리운 거죠?"
제가 한 말에 본인이 더 놀랐는지 그는 어찌할 바 몰라 보였다. 민망해하는 그를 보고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또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그녀가 알던 것보다 빨리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한 손으로 그의 눈을 덮엇다. 뻣뻣하게 굳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고 그녀가 말했다.
"왜냐면 당신은 날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난 당신이랑 백 년 가까이 같이 있었거든."
손바닥 밑으로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있잖아, 방금 네가 한 말 모른 척하고 넘겨버린 게 지금까지 서른네 번째인데...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정직하게 대답해주는 게 좋겠지? 내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뭔가가 계속 실패하는 중인데, 네가 시도한 그 질문도 자꾸 거절당하니까 보기에 별로 좋질 않네."
그녀는 손을 떼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래. 나도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랑은 다른 의미로 더 많이, 더 오래 그리워했어. 내가 아직도 만나지 못한 미래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시간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서른다섯 번째의 기묘한 질문을 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하지만, 봐요. 이게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는 자신이 멈춰버린 불꽃들을 가리켰다.
"만약 여기서 비원 사람을 마주치면, 난 내가 멈춘 불을 집어다 그 사람 입속에 넣고 능력을 풀 거에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불길은 그 사람 목과 폐를 태우겠죠. 여기는 그런 사람이 지휘하는 곳이에요. 눈으로 봤으니, 직접 생각해서 결정하세요. 이런 데에서 도망치는 데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그녀는 과거 몇 번이고 했던 말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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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해온 거랑 똑같죠. 저쪽의 서리 씨랑 내가 죽는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꿈꾸는 사람이 죽으면 꿈도 사라질 테니까..., 그 때까진 그 쪽 세상을 지켜보면서 한가하게 시간 보내보죠, 뭐. 당신들이랑 서리 씨를 구경하는 건 꽤 즐겁거든요."
최주상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하니 그러마 하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려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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