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네다 2020. 10. 2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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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Ending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 최세희

다산책방

 

26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가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부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33

콜린은 나보다 더 잘 준비된 답변을 했다.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 입니다. 선생님."

"어떤 이유로?"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선생님. 우리는 이제껏 역사가 트림하는 것을 보고 또 보았고, 올해에도 또 보고 있습니다. 폭정과 폭동, 전쟁과 평화, 번영과 빈곤 사이를 오가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뿐이죠."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과연?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 입니다. 파트리크 라그랑주, 프랑스인입니다."

 

41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당시에 '교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설명해두는 게 좋겠다. 최근에 친하게 지내는 여성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의 딸이 고민을 안고 찾아왔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대학 2학기째였던 그녀의 딸이 한 남자와 자게 됐는데, 그남자는 - 공공연히, 그리고 친구 딸이 아는 바로는 - 비슷한 시기에 딴 여자들하고도 잤다는 거였다. 그는 '교제할' 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 그 여자들 전부를 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딸은 황망해 했는데, 그 방식보다는 - 그것이 얼토당토않다는 건 반쯤 인식했지만 - 자신이 끝내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아직도 순무를 조각한 것을 화폐 대신 쓰는 낡고 뒤처진 시대의 생존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 때'는 - 비록 나는 당시에도 그 시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었고, 지금은 갈수록 더 그렇지만 - 이런 식이었다. 여자를 만나고,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고, 몇몇 사교성 행사 - 가령, 펍에가기 - 에 여자를 초대하고, 다음엔 둘이서만 데이트를 하고, 또 하고, 다양한 온도의 굿나잇 키스가 끝난 후에야 어떻게든 그녀와 공식적으로 '교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관계가 사회적으로 반쯤 공인된 후에야 그 여자가 성에 대해 어떤 방침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핟면 이는 간혹 여자친구의 몸이 어로행위 금지구역만큼이나 삼엄한 경비를 갖추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86
가족마다 양상이 각기 달리 나타나는 공동의 침묵 끝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걔가 너무 똑똑해서 그랬을까?"
"지성과 자살이 연관이 있다는 통계는 본 적이 없는데요."
내가 대꾸했다.
"그래, 토니, 하지만 엄마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니."
"아뇨, 사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럼 이렇게 말해볼까. 넌 똑똑한 아이야. 하지만 그런 짓을 할 만큼 똑똑하진 않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어머니를 응시했다.



144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245
그 편지를 보내고 나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더 나빠졌는지는 모르겠다.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탈진한 나머지, 방전이 된 느낌이었다. 마거릿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마거릿보다는 수지 생각을 더 많이 했고, 또 부모라면 누구나 누리는 복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식이 태어났을 때 사지 멀쩡하게 정상적인 두뇌를 가지는 것, 그리고 아이고, 소녀가, 또 성인여성이 장차 자신의 능력껏 인생을 이끌게 해주는 정서적인 기질을 갖추는 복에 대해 생각했다. 평범한 인간이 되기를, 한 시인은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에게 축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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