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뉴턴의 아틀리에

네다 2021. 2. 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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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김상욱, 유지원

민음사

 

70

'농담'의 희생자 루드비크는 자신의 유머가 오해되어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 쉽게 말해서 복수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 깨닫는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유머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야기하는 불편을 호감으로 바꾼다. 하지만 유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차이는 오히려 증폭된다. 보테로의 비만을 오해하고 지방을 모두 제거하면 세포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어 죽고 만다. 부적절한 유머를 구사하여 유머가 오히려 상대를 무장시킬 때, 잘못이 잊히길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루드비크의 적절한 유머는 잘못된 시공간 속에서 운 나쁜 사람을 만나 부적절해져 버렸다. 하지만, 대개는 유머 없는 행복보다 유머 있는 불행이 낫다. 유머 없이 사는 것보다 더 불행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118

인간 바깥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비물질이나 무생물을 제외하면, 인간의 반대 개념으로는 네 가지가 떠오른다. 오선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신', 그리고 지구 밖에 존재하는 지능이 높거나 낮은 '외계 생명체', 우리의 지구로 돌아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제조한 기계'가 있다.

 

142

사실 우리 같은 다세포생물에게 있어 죽음은 번식의 대가다. 단세포생물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둘로 나누어 개체수를 늘린다. 다세포생물은 동일한 DNA를 갖는 수많은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 이들 세포 각각은 독자적으로 살수 있는 존재이지만 개체를 위해 자유와 영생을 포기했다. 오직 생식세포만이 이들을 대표하여 자손으로 남는다. 자손을 남긴 다세포생물은 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우리 같은 다세포생물에게 죽음은 섹스의 대가다. 

...죽은에 대해 우울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으니 끝으로 좋은 소식을 알려 주고자 한다. 사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음은 없다. 38억 년 전 지구에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다. 단세포생물에 가까웠을 이 세포는 분열하고 진화했다. 이 생명체가 가졌던 생명의 정보는 지금도 우리 몸에 남아있다. 나의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연속된 생명의 사슬이 최초의 생명체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나를 포함한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최초의 생명체가 가졌던 생존과 번식 요구를 물려받은 후손이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 유산을 이어가며 번성할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생명은 영원하다.

 

150

재질의 촉감은 눈으로도 만져지는 감각이다. 몸은 말할 것도 없다. 재료를 영어로는 머티리얼material이라고 한다. 물리세계에서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면 그 표면은 질감을 갖는다. 머티리얼의 어원은 모든 것을 낳는 어머니인 라틴어 마테르mater에서 왔다. 한편, 다소 이성적이고 기하학적인 형상인 패턴patern의 어원은 아버지인 라틴어 파테르pater다. 어머니 '재료'와 아버지 '형상'은 우리의 눈에 하나로 섞여 감각되고, 우리의 뇌에 지각되어, 마침내 우리로부터 '감정'이라는 자식을 배태해 낸다.

 

220

인간의 언어는 수학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수학으로 쓰인 물리학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종종 오해가 발생한다.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문법적으로 오류는 없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의 전자는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옳은 문장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일상어로 바뀐 물리학의 내용은 종종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수학의 도움으로 자연을 한 치의 모호함 없이 기술할 수 있다.

 

250

1967년 이응노의 삶에 큰 불행이 닥친다. 소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 부정선거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만들어 낸 대규모 조작극이었다. 음악가 윤이상과 시인 천상병도 여기에 연루되었는데, 천상병은 고문으로 몸을 망쳤다. 이응노는 감옥을 나온 뒤에도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으며 온갖 오해와 차별을 당하자, 한국 국적을 버리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이후 이응노는 한국 방문 신청이 번번이 거절되어 끝내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1980년대 이응노는 새로운 화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986년작 '군상'에는 깨알같이 작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이름도 얼굴도 없다. 가난한 사람인지 부유한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뒤엉켜 춤을 추는 듯이 보인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한 이응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화폭에 담은 것이다.

'군상'의 사람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붓질 한 번으로 그려진 이들에게 이름 따위가 있을 리 없지만, 저마다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먹으로 이렇게 그린 것은 원래 글씨가 아니던가. 한자는 상형문자다. '사람인'도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 작가는 사람 하나를 그리는 데 몇 초밖에 안 걸렸다고 했지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형태를 문자 삼아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 역동적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는 힘이 느껴진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도 없을 것이다.

 

256

글씨를 쓰는 어린이들의 작은 어깨가 기울어지며 힘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는 듯했다. 교과서를 살펴보니 표면에 매끈한 코팅이 된 종이를 썼다. 아마 그림들이 선명한 색으로 인쇄되도록 하기 위해 그런 종이를 택한 모양이다. 문제는 초등학생들에게 연필이라는 필기도구가 권장된다는 사실이다. 매끈한 표면 위에서 볼펜은 막힘없이 잘 굴러가지만, 연필은 종이 표면에 마찰해서 흑연을 옮겨 묻게 해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거친 표면일 때 힘이 덜 든다.

종이가 힘을 쾌적하게 받아주지 못하는 부담을 어린이들의 작은 신체가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너무 꾹꾹 눌러 쓰느라 종이 뒤로 연필 자국이 깊이 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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