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네다 2021. 3. 1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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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민음사

 

이 드라마를 결정한 것은 '조직'의 과학자들이었다. 계산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훈련을 받고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자 그들은 나를 2주간 냉동했다. 그동안 나의 뇌파를 샅샅이 조사하고 거기에서 나의 의식의 핵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추출한 다음 그걸 나의 셔플링을 위한 패스.드라마로 정하고, 그걸 다시 나의 뇌 속에 입력한것이다. 그들은 드라마 제목이 '세계의 끝'이며, 그것이 내가 셔플링르 할 때 사용하는 비밀번호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의식은 완전한 이중 구조가 되었다. 즉 카오스 같은 의식이 전체로서 존재하고, 그 안에 마치 매실 씨처럼 그 카오스를 요약한 의식의 핵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의식의 핵의 내용을 내게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네는 그걸 알 필요가 없어." 그들은 내게 설명했다. "왜냐하면 무의식만큼 정확한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지. 어느정도 나이 - 우리는 주의 깊게 계산해서 그 나이를 스물여덟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 에 이르면 인간 의식의 총체는 거의 변화하지 않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의 변혁이라 부르는 것은, 뇌 전체의 작용으로 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표층적 오차에 불과하지. 따라서 이 '세계의 끝'이라는 자네 의식의 핵은, 자네가 숨을 거둘 때까지 변함없이 정확하게 자네 의식의 핵으로 기능할 것야. 여기까지는 이해하겠나?"

"네 이해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모든 이론과 분석은, 말하자면 짧은 바늘 끝으로 수박을 가르려는 짓이나 마찬가지야. 껍질에 표시는 낼 수 있지만, 과육까지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지. 그러니 우리는 껍질과 과육을 분명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는거야. 하기야 세상에는 껍질만 깨작거리며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지."

"요컨대." 그들은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자네의 패스.드라마를 자네 의식의 표층적인 흔들림으로부터 영원히 보호해야만 해. 만약 우리가 자네에게 '세상의 끝'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내용을 알려 준다고 해 보자고. 다시 말해서 수박 껍질을 벗겨주는 거지. 그러면 자네는 틀림없이 그걸 주물러서 바꿔 버릴 거야. 이건 이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느니, 여기에는 이걸 덧붙이면 좋겠다느니 하면서 말이지. 그리고 그러짓을 해 버리면, 패스.드라마의 보편성이 순식간에 소멸되어 셔플링이 성립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자네의 수박에 두꺼운 껍질을 부여한 것이야." 다른 과학자가 말했다. "자네는 그걸 불러낼 수는 있어. 그건 바로 자네 자신이니까 말이지. 그러나 그걸 알 수는 없어. 모든 것은 카오스의 바다 속에서 행해지지. 즉, 자네는 맨손으로 카오스의 바다에 헤엄쳐 들어가고, 또 맨손으로 거기에서 나오는 셈이야. 내 말을 이해하겠나?"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런 거야." 그들이 말했다. "사람은 자기 의식의 핵을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가?"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대답했다.

"우리도 몰라." 그들이 말했다. "이건 말하자면 과학을 넘어선 문제지. 로스앨러모스에서 원폭을 개발했던 과학자들이 직면했던 것과 유사한 문제야."

"로스앨러모스보다 더 중대한 문제지." 다른 과학자가 말했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어. 이 일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위험한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지."

 

1권

89

나는 계산하러 가는 곳마다 쉬는 시간이 되면 거기 있는 소파에 눕는데, 누워서 편한 소파는 별로 없다. 대개 별 고민 없이 대충 사다 놓은 조잡한 소파이고, 언뜻 보기에 고급스러운 소파라도 정작 누워 보고 실망하느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소파를 무성의하게 선택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 소파를 고르는 안목에  그 사람의 품위가 드러나는 법 - 아마 편견이겠지만 - 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소파란 모름지기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확고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좋은 소파에 앉으며 자란 인간밖에 알지 못한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소파는 또 다른 좋은 소파를 낳고, 나쁜 소파는 또 다른 나쁜 소파를 낳는다. 그런 것이다.

고급 차를 몰고 다니면서 집에는 2, 3급 소파를 놓고 사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비싼 차에는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그래 봐야 그저 비싼 차에 지나지 않는다. 돈만 지불하면 누구든 살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소파를 사려면 나름의 식견과 경험과 철학이 필요하다. 돈도 필요하지만, 돈만 내면 그만이 아니다. 소파란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 없이는 좋은 소파를 가질 수 없다.

 

2권

88

"우선 내 이론을 간단히 설명하지. 암호에 대한 일반론이 있어요. 즉 '해독할 수 없는 암호는 없다'라는 것인데, 물론 옳은 말이야. 왜냐하면, 암호란 것은 어떤 유의 원칙에 따라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지. 원칙이란 그게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하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공통항 같은 것이에요. 따라서 그 원칙을 이해할 수 있으면 암호도 풀 수 있지. 암호 중에서 가장 신뢰성이 높은 것이 북 투 북 - 암호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동일한 판본의 책을 지니고 그 페이지 수와 행으로 단어를 정하는 시스템 - 인테, 이 방법도 책이 발견되어 버리면 끝이지. 게다가 늘 그 책을 가까이에 두어야 하니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완벽한 암호는 딱 한가지밖에 없다고 말이야. 바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스크램블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와벽한 블랙박스를 통해 정보를 스크램블하고, 그걸 처리해서 다시 똑같은 블랙박스를 통해 역스크램블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블랙박스의 내용과 원리를 본인조차 모르게 하는 것.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게 한다는 말이에요. 본인도 모르는데, 타인이 힘으로 그 정보를 빼낼 수는 없지."

 

231

짐 모리슨이 죽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도어스의 음악을 틀어 놓고 달리는 택시와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세상에는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지 않는다. 택시에서 흐르는 음악도 그중 하나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언제나 가요나 시답잖은 토크쇼나 야구 중계가 흐를 분이다. 백화점에서는 레몽 르페브르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흐르고, 맥주 펍에서는 폴카가 흐르고, 연말의 상점가에서는 더 벤처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는 법이다.

 

252

"우리가 전에 만났을 때, 나는 이 마을은 부자연스럽고 잘못되었다고 했어. 그리고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나름으로 완결되어 있다고 했지. 지금 너는 그 완결성의 완전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그러니 나는 그 부자연스러움과 잘못에 대해 얘기하지. 잘 들어. 우선 첫째로, 이건 중심이 되는 명제인데, 완전함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전에도 말했지만 영구 기계가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해. 그런데 이 마을은 그걸 대체 어디로 배출하고 있을까? 여기 사람들은 - 문지기는 예외지만 - 서로 상처를 주거나 증오하지 않고, 욕망도 없어. 모두 충족된 상태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왤까? 그건 마음이 없기 때문이야."

..."이 마을의 완전함은 마음을 버리고 성립된 거야. 마음을 버리고. 각자의 존재를 영원히 팽창되는 시간 속에 끼워 넣은 것이지. 그래서 아무도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거야. 우선 그림자라는 자아의 모체를 떼어 내고, 그게 죽기를 기다려. 그림자가 죽고 나면 그 다음에는 별 문제가 없어. 나날이 생기는 마음의 자잘한 거품 같은 것을 퍼내기만 하면 되지."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고. 우선 마음의 문제야. 너는 이 마을에 싸움도 증오도 욕망도 없다고 했어. 그건 아주 좋은 일이지. 나도 기운만 있으면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나 싸움과 증오나 욕망이 없다는 건, 즉, 그 반대도 없다는 뜻이야. 기쁨과 축복과 애정 같은 거 말이야.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생겨날 수 있는 거라고. 절망이 없는 축복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그게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255

"마음은 짐승들이 벽밖으로 가져가. 그게 퍼낸다는 말의 의미야. 짐승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흡수하고 회수해서 그걸 바깥 세계로 가져가. 그리고 겨울이 오면 그런 자아를 몸 안에 축적한 채 죽어 가지. 그들이 죽는 것은 겨울 추위 때문도 아니고 먹을거리가 부족해서도 아니야. 그들을 죽이는 것은 마을이 떠넘긴 자아의 무게라고. 그리고 봄이 오면 새 짐승이 태어나지. 죽은 짐숭의 수만큼 새끼가 태어나. 그리고 그 새끼들도 성장하면 사람들이 토해 낸 자아를 짊어지고 똑같이 죽어가. 그게 완전함의 대가야. 그런 완전함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약하고 무력한 것에 모든 것을 떠넘겨야 유지되는 완전함에 말이야."

..."짐승이 죽으면 문지기는 그 두개골을 잘라 내지. 그 두개골 속에 자아가 오롯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두개골은 깨끗하게 처리되어 1년 동안 땅에 묻혀 있다가 그 힘이 진정되면 도서관 서고로 옮겨져. 그리고 꿈 읽기가 거기 담긴 것을 대기 속으로 방출하는 거야. 꿈 읽기는 - 즉 너를 말하는 거야 - 새로이 마을에 들어와그림자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맡는 역할이야. 꿈 읽기가 읽어 낸 자아는 대기 중으로 빨려 들어가 어딘가로 사라지지. 그게 즉 '오래된 꿈'이라고. 요컨대 너는 전기 접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야."

..."그림자가 죽으면 꿈 읽기도 꿈 읽는 일을 그만두고 마을에 동화돼. 마을은 그런 식으로 완전성의 고리 속을 영원히 돌고 돌아. 불완전한 부분을 불완전한 존재에게 떠넘기고, 그리고 그 웃물만 홀짝거리면서 사는 거라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 너? 그게 진정한 세계냐고. 그게 존재의 진정한 모습이냐고. 잘 들어, 약하고 불완전한 쪽의 입장에서 봐. 짐승과 그림자와 숲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이야."

 

296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건 아직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할 수 있어. 나는 알아. 반드시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그걸 찾아낼 거야."

"당신은 강물 속에 떨어진 빗방울을 가려내려 하고 있어요."

"마음이라는 건 빗방울과는 달라. 그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만약 당신이 나를 믿을 수 있다면, 나를 믿어 줘. 나는 반드시 찾아낼 거야. 이곳에는 모든 것이 있고, 또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꼭 찾아낼 수 있을거야."

"내 마음을 찾아 줘요." 한참 후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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