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조선일보Books] 슈퍼자본주의

네다 2008. 6. 7. 01:43
728x90

조선일보Books |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합리적 균형을 위하여

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형선호 옮김|김영사|364쪽|1만7000원

 

정치권·기업 사이 새로운 법과 제도 필요

사회적 책임 강요는 이윤추구 원칙에 어긋나 로버트 라이시 전 미국 노동장관이 2005년 9월 존 로버츠 미 연방 대법원장 지명자 인사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라이시는“기업에게 민주주의의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 로이터

20세기 전반 영국 정치이론가이자 경제학자였던 콜(G.D.H.Cole)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와 경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인지는 명쾌히 밝혀진 것이 없다. 밀턴 프리드만(Friedman)은 자유로운 시장은 정치적인 자유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선결조건이라고 천명했다. 적어도 2차 대전 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미국은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가 손에 손을 잡고 간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후 그 관계는 균형을 잃어버렸다. 자유시장의 자본주의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는 오히려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일》(The Work of Nations)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라이시(Reich) 교수는 이 책에서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했다고 선언했다. 슈퍼자본주의란 무엇을 말하는가?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제도와 계약의 자유를 바탕으로 개별 경제주체들이 끊임없이 사익을 추구하는 경제 체제다. 소비자는 조금이라도 더 값싼 물건을 찾고 투자자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좇는다. 라이시 교수가 말하는 슈퍼자본주의란 소비자와 투자자가 각각 낮은 소비재가격과 높은 투자수익률을 가능한 한 극대로 추구하는데 성공한 상황,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대기업, 정부, 노동자, NGO들이 안정적인 과점(寡占)체제를 이루며 생산자, 소비자, 노동자들에게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효율성은 정체됐고 조세프 슘페터(Schumpeter·오스트리아 출신 하버드 경제학자)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혁신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달랐다. 미국의 경우 밀월기의 안정적인 과점체제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소련과의 경쟁이 국방부와 NASA로 하여금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게 했다. 새로이 개발된 아이디어와 기술들은 민간부문으로 흘러 들어갔고, 세계화, 새로운 생산방식의 출현, 탈규제 등의 변화를 일으키며 시장에 경쟁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 과정에서 과점체제를 위협하는 다수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출현했고 황금기의 안정적인 과점체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금융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금기금과 보험회사가 안정성이 높은 회사채와 국공채뿐만 아니라 주식에도 자산을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금융의 탈규제는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어 각각의 개인들을 단순한 저축자에서 투자자로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금융기관들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게 됐다. 특히 각종 펀드들은 투자자들의 수익을 올려주는 경쟁을 하면서 투자자들의 수익률이 사상 최고로 올라갔다.

 

결국 투자자들도 덕을 보고 소비자들도 덕을 보았으며 그에 맞게 기업들도 과거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면서 혁신적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성공의 이면에는 점점 더 낮아지는 임금과 복지혜택, 일자리 상실, 불평등의 심화, 공동체의 상실, 지구온난화, 추잡한 제품 등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라이시 교수는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기관들, 즉 거대 과점기업, 거대 산별 노조, 그리고 법적 규제를 통해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부 기관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들로 이동했고,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가 너무도 효율적이고 역동적이어서 시민으로서의 욕구는 오히려 전보다 커졌지만 우리가 시장에서 행사하는 갖가지 선택은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소비자-투자자와 시민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는 사회적 방식 혹은 법과 제도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런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다. 정치권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로비활동에 포섭됐다. 정치권에서 대기업으로부터 나오는 돈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고, 경쟁적인 기업 이익들의 충돌 이외의 다른 문제들은 정치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설에 답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사회 일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인 기업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게임의 규칙,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슈퍼자본주의의 승리는 뜻하지 않게 민주주의의 쇠퇴를 초래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활기찬 자본주의와 함께 활기찬 민주주의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이 두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좋은 거래를 제공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소외 계층을 배려하면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이룰 수 없는 목표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 위해 라이시 교수는 노동조합의 강화와 정치 헌금의 제한을 제안하고, 나아가 기업은 법률적인 허구로서 많은 계약들을 함께 묶은 것에 불과하다면서 기업에게 민주주의의 권리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인세가 비효율적이고 또한 불평등하므로 법인세를 폐지하고 기업이 주주들을 대신해 벌어들인 모든 소득에 (그것이 기업에 유보됐거나 배당금으로 지급됐든지 간에) 개인적인 세금을 내게 하자고 말했다. 대신 그는 기업에 대한 형식적 기소를 중지하고 기업에게 법정에서 다툴 제소권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만이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의 현대 자본주의 분석은 날카롭고 또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진단이 반드시 명쾌한 처방을 가져오지 않을 수 있듯이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에 대한 대책이 현실적인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것인지는 선뜻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 경제가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개방향을 가늠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오늘날 '슈퍼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별로 없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