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조선일보Books] 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

네다 2008. 6. 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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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Books |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학
동아시아는 유럽과 닮은 통합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

하영선 등 지음|동아시아연구원|495쪽|2만원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이를 때 가끔 쓰는 공동체란 표현은 강한 개념이다. 법과 질서가 강조되고 주민들 사이의 일체성과 자발적인 협동이 부각된다. 소규모의 단위를 이를 때 외에는 별로 쓰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요즘 공동체란 용어는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운위할 때 더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주로 지역을 중심으로 운위된다. 유럽공동체(EC)가 공동체를 넘어 유럽연합(EU)을 이루더니 그것을 모델로 하여 동북아 공동체, 동아시아 공동체의 논의가 부쩍 눈에 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국제 '사회'라는 용어조차 금기다. 국제 '무정부'가 표준용어다. 국가들 위에 군림하여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세계정부가 없다는 의미에서다. 영국의 국제정치학계는 그래도 국제법과 규범을 강조하는 국제사회론을 개발했지만 소수설에 불과하다. 하물며 공동체까지야.

따라서 국제공동체 또는 지역공동체란 분석용어라기보다 정치 프로그램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그것이 역사적 조건이 맞아 떨어져 폭넓은 지지를 얻으면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 거기에 정치의 멋과 위대함이 있다.

 

그러나 조건이 맞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현실을 호도하는 신화가 된다. 그래서 현실을 이끄는 데 실패한다. 그 실패의 결과가 현상유지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자칫 현상을 뒤로 돌려 재앙을 빚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연맹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동아시아에서 운위되는 공동체론이 프로그램으로서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그 신화를 부수고자 한다. 신화에 호도된 프로그램이 초래할 지도 모를 재앙적 결과를 우려해서다.

 

유럽의 사례는 그 일반화 가능성이 아니라 예외성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유럽인들이 한 나라를 넘어선 유럽인으로서 정체성을 발전시킨 것은 지난 수백 년간 무수히 치고 받고 싸운 결과다. 그에 비견할 지역정체성은 아직 동아시아에서 찾기 어렵다.

지리적으로 역외 국가이나 정치경제적으로 역내국가인 미국, 유럽국가인 동시에 아시아 국가인 러시아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그들에게 동아시아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대상이 아니라 경략의 대상이다. 핵심 역내 국가인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공동체 전략은 지역전략이 아니라 국가전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부수는 데만 있지 않다. 공동체 개념이 분석적으로 서투르고 신화로서 위험하다고 다수 국가들이 병존하여 서로 교류하며 사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 현실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당위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분석의 개념으로서, 전략의 출발점으로서 네트워크의 개념을 제안한다. 네트워크는 복수 단위들이 공간 속에서 엮어진 모습이다. 거미줄이나 그물망과 같은 모습을 띤다. 그물망으로 엮어진 단위들은 상호의존적이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른 쪽에 파장을 미친다. 지구화, 정보화에 따라 그물의 코가 촘촘해졌고 상호의존성도 크게 높아졌다. 분석개념으로서 네트워크의 유용성도 커졌다.

네트워크 그물망은 하나만이 아니다. 안보, 경제, 문화, 에너지/환경, 지식/정보 등 국제관계의 제반 분야에 존재한다. 각 분야의 그물망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가 맞물려 네트워크 복합체를 이룬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네트워크를 그리고자 노력했다. 거기에 그것을 지수화하려는 참신한 노력도 더하고 있다.

 

나라별, 분야별 국내최고의 전문가들이 오랜 공동작업 끝에 출판한 이 책의 가치는 높다. 지역통합의 논의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많은 지식을 담고 있다. 국내에서 지역통합 논의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인 만큼 후속 논의에 불을 지핌과 동시에 방향을 설정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쉬움도 없지 않다. 동북아를 넘어선 동아시아를 말하면서 동남아가 빠졌다. 덩치는 작으나 숫자가 많고 ASEAN, APEC, ASEAN+3, 동아시아 정상회의 등 지역통합을 선도해 온 지역이다. 각 강대국의 입장과 전략을 기술하고 분석함에 있어 그들 전략이 맞물리는 상호성 효과를 좀 더 부각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각 분야에서의 협력과 갈등을 따지면서 분야 간의 연결고리를 더했으면 이 책이 강조하는 입체성과 복합성이 더 두드러져 보일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아쉬움을 채워줄 후속 작업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