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Books |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두 제국의 야욕, 중앙아(亞) 비극의 불씨가 되다
그레이트 게임
피터 홉커크 지음|정영목 옮김|사계절|692쪽|2만9500원
1842년 6월 어느 날 아침 중앙아시아의 도시 부하라 궁정 앞 광장에 두 사람이 끌려나왔다. 영국군 찰스 스토다트 대령과 아서 코널리 대위였다. 두 사람은 위험한 게임에 뛰어든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러시아를 제치고 부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 스토다트를 파견했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은 잘못됐고 스토다트는 감옥에 갇혔다. 스토다트의 석방을 요구하러 부하라에 자원해 들어온 코널리도 같은 신세가 됐다. 스토다트의 목이 먼저 잘렸다. 몇 분 후 코널리도 처형당했다.
스토다트와 코널리는 '그레이트 게임'에 뛰어든 영국과 러시아의 수많은 장교와 탐험가들 중 하나였다.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과 러시아가 19세기 초부터 100년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펼친 외교, 첩보, 전쟁을 이른다. 코널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등장했다.
〈더 타임스〉에서 20년간 중동·극동아시아 전문기자로 일한 피터 홉커크(Hopkirk)는 사막과 산맥을 누비며 모험을 한 당사자들의 여행기와 보고서, 관련 사료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최신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눈 덮인 캅카스 산맥부터 중앙아시아를 넘어 티베트와 중국령 카슈가르까지 광활한 지역을 무대삼아 파란만장한 역사를 한편의 탐정소설 쓰듯 박진감 있게 풀어나간다.
이 지역이 두 제국의 관심을 끈 것은 인도 때문이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확보한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해서 인도로 진격할까봐 두려워했다. 1834년 코널리는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로 진격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한 민족으로서 침략군에게 저항하기로 결심하면 전진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1839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점령하고, 친(親)영국계 군주를 옹립했으나 3년 뒤 반군에게 군인 4000명과 민간인 1만6000명 거의 전부가 몰살당했다.
이 책의 매력은 강도를 당해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팔릴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의 이익을 위해 온갖 역경을 헤쳐간 모험가들의 여정에 있다. 1810년 봄베이 원주민 제5보병대 소속 크리스티 대위와 포팅어 중위가 말 장수와 이슬람 순례자 행세를 하며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4000㎞ 가까이 정탐 임무를 수행한 이래 20세기 초 영허즈번드에 이르기까지, 또 무라비요프와 빗케비치, 그롬쳅스키와 바드마예프에 이르는 러시아 장교들까지 300명이 넘는 '주연배우'들이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조금씩 먹어 들어갔고, 20세기 초 파미르 고원에서 영국 세력과 부딪치게 된다. '그레이트 게임'은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 페르시아를 둘러싼 협상을 마무리하면서 일단 막을 내렸다. 군인들이 물러난 중앙아시아엔 민간인 탐험가들(유물사냥꾼)들이 들어왔다. 스웨덴의 헤딘,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독일의 르콕, 일본의 오타니 등이다. 홉커크의 전작 《실크로드의 악마들》을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짝이 맞을 것이다.
홉커크의 글은 '제국'의 반대편에 있던 우리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대목도 있다. 2000년 가까이 동·서 문명을 이어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중앙아시아를 '경쟁하는 두 제국 사이에 놓인 거대한 무인지대'(166쪽)로 표현한다든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제국의 첩보원들을 경계했을 중앙아시아의 지배자들을 잔혹한 군주로 묘사하는 '오리엔탈리즘'도 거슬린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캅카스에서 티베트까지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펼치는 열강의 각축이 오랜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데 있다.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진주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레이트 게임'의 속편인 셈이다. '판돈'이 인도와 면화에서 석유와 가스, 광산자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요즘의 그루지야 사태를 둘러싼 러시아·미국의 대립도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전으로 볼 수 있다.
원제 The Great Game: on Secret Service in High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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