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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31221 이탈리아 로마 -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네다 2014. 1. 1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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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1 맑음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Colosseum
콜로세움은 엄청 크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듣고 갔더니, 별로 크지 않게 보였다. 그래도 컸다. 최대 7만명 입장 가능이라고 하니, 작을수가 없다. 복구할때 완벽하게 다 감싸서 복구하지 않고 파괴된 부분을 사선으로 잘라서 껍데기별로 복구한 것은 정말 센스넘치는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돈내고 들어가지 않은 나같은 겉핥기 여행자도 구조를 잘 파악할 수 있고, 더 예쁘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완공후 100일 축제 기간동안 개막식을 올렸다. 온천 침전물 대리석으로 건축되었다. 애초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극장 -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Amphitheatrum Plavium - 으로 불렸다. 콜로세움이라는 말의 어원은 논란이 있으나, 인근에 30미터짜리 네로황제 청동상이 있었기 때문에 '콜로수스 Colossus -거대한, 육중한- 옆에 있는 경기장'이라는 말이 줄어들어, 콜로세움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 Colosseo 라고 한다. 네로황제 청동상은 아폴론 얼굴로 바뀌어서 6세기까지 존재했다.

 

둘레 527m, 외벽 높이 48m의 4층 건물로, 5만 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최대 6,7만명까지 수용했다. 1층 귀족, 2층 기사, 3층 평민, 4층 하층민 까지 이용하였다. 전 건물에 걸쳐 아치가 이어져 있는데, 이 아치가 하중을 분산하고 문 역할을 해서  전 인원이 20분만에 착석할 수 있었다. 1층 아치문마다 고유번호가 있다. 층마다 아치는 80개이나, 번호는 76번까지인데, 최고위층 전용 출입구 4개 번호는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외부는 각각 다른 양식의 기둥을 박아 놓았는데 1층은 도리스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장식하였다. 4층에는 돌이 튀어나와 있는데, 이곳에 나무막대기를 꽂고 천장 위로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쳐서 햇빛을 가리기도 했다. 원래는 아치 돌마다 구멍이 있어 돌과 돌을 연결시키는 쇠 이음새가 있었다. 다른 유적에서는 종종 볼수 있다. 무솔리니가 제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뜯어갔다. 또 돌을 들어올릴 때 사용했던 기중기의 쇠를 꽂아놓았던 흔적도 있다.

 

애초에는 경기장에 물을 채워 모의해상전투(나우마키아)를 모사하거나, 고전극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물을 빼고 나무바닥 운동장을 만들면서 검투경기장으로 변경되었다. 정부가 세울 때는 '공공목적을 충족하는 군사시설'로 계획한 듯하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기 마련이다. 검투경기에서 흘린 피 때문에 나무바닥이 썩었기 때문에 모래를 깔았다. 이 모래의 원래 이름이 아레나 Arena 였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포로들 중 운동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여 잘싸우는 이들을 선발하였으나, 이들의 인기가 많아지고 경제력에 향상되자 지원자가 늘어남에 따라 검투사 양성학교를 세우고 잘생기고 훤칠한 검투사를 양성하기에 이른다. 콜로세움은 황제의 정치적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검투경기가 끝나고서도 황제는 검투사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있었다. 경기를 치를 검투사나 맹수가 있는 곳은 지하 12m 깊이의 공간으로 이들을 등장시킬 때엔 수동 엘리베이터 시설을 이용하여 끌어 올렸다. 맹수중에는 기린이나 팬더같은 초식동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네로 황제가 잔인한 살육극을 즐겼다는 오해가 있지만 사실은 네로 사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하였으므로, 네로황제는 콜로세움을 보지 못했다. 또는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노래를 했다는 오해가 있다. 네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술을 사랑했다. 원체 성격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기도 했다. 모친 아그리피나의 집념과 정치의 결과로 황제에 즉위하기는 했으나, 그는 자신을 시인 가수로 생각했다. 64년 7월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것도 네로가 어느 지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때 였을 것이다. 네로는 즉시 상경하여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 네로는 성정이 유약하고 이전 황제들과 같은 위엄이나 강력한 권력은 없었으나, 자신의 국가를 전소시킬만큼 미치거나 광란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화재가 어느정도 진압되자, 네로는 시민 위로의 차원에서 현 콜로세움 위치에 호수공원을 만들고자 했다. 자신이 거기서 노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4년 후, 모친살해와 로마대화재로 인한 지속적인 인기 하락, 반역으로 인해 퇴위되고 도망가서 자살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o di Constantino
어떤 여행자도 로마에 갔을때 모든 유적을 완전한 상태로 볼수 없다고 하는데(그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보수중이기 때문에) 아쉽게도 내가 갔을때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보수중이었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로 진군할 때 대낮에 십자가에서 보낸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환상을 보았다. 이후 그는 티베르강 밀비우스다리 전투에서 전임황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했다. 이 승리를 통해 서로마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원로원은 로마 황제들이 축하행렬을 벌일 때 택했던 오래된 길인 '비아트리움팔리스'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건설하여 31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봉헌하였다. 가장 윗부분에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전투,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를 표시하는 장면,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나폴레옹이 이 개선문을 파리로 이동시키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파리에 카루젤 개선문을 다시 건설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십자가의 환영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함을 경축하며, 로마내 기독교를 승인하는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발행하였다. 

 

 

 

 

 

 

 

 

 

 

 

아치 중간중간 구멍이 나있는 곳이 이음새로 썼던 쇠가 꽂혀있던 곳이다.

 

 

 

 

 

 

'1750년 교황은 콜로세움을 기독교의 성지로 지정하고 보존할 것을 지시한다'는 내용의 석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비우스다리 전투에서 당시 황제 막센티우스 군을 물리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