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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31221 이탈리아 로마 - 포로로마노

네다 2014. 1. 1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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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1 맑음
이탈리아 로마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콜로세움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있는 베네치아 광장에 가는 길에 포로로마노를 겉에서 살짝 볼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포로로마노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놓여져있다. 포로 로마노의 고대어는 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 이다. 자랑스럽게도 이탈리아의 빛나는 전범 무솔리니가 지시한 것이다. 과거의 유적 위로 개선행진을 하고 싶다는 당당한 포부에 따라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에 이르는 가로지르는 대로가 조성되었다. 조상 잘못 모시면 천벌 받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물론 현세인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 대로를 오가며 포로로마노를 한눈에 조망한다. 기원전 조상들의 시장, 법정, 관공서, 무덤을 들여다 보는것은 신기하거나 재미있다기보다는 감사의 마음을 들게 하는 경험이다. 그리고 캄피돌리오 언덕을 올라가면서까지 포로로마노를 관람할 수 있다. 애초에 광장을 만든 장소가 일곱개의 언덕 중간 평지였으니, 언덕에서 평지가 잘 내려다 보이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캄피돌리오 언덕을 올라가면서 잘 보이는 것은 공회당과 신전 등이다.

 

보통 강 유역에서 발원하는 여타 마을, 도읍들과는 달리, 로마 테베레 강 유역은 사람이 살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정기적인 범람, 말라리아 출몰 등은 초기 주민들을 언덕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최초 로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아벤티노, 에스퀼리누스, 첼리, 키리날레, 비미날레, 캄피돌리오 언덕 등 주로 언덕에 거주공간이 형성되었다. 언덕위에 살던 사람들은 물물교환, 상호교류가 활발해지자 점차 언덕 밑으로 진출하였다. 포룸이라는 말은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부라는 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위치는 중심지였다. 최초의 포룸은 카피돌리움, 팔라티움, 에스퀼리누스 언덕 사이 평지였다. 원래 이 평지에는 원주민들이 수장묘지로 사용하던 늪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에트루리아왕 타르퀴노 프리스코가 범람하는 테베레강에 대응하여 대하수도 - 클로아카 악시마 Cloaca Maxima - 를 건설하고 간척사업을 해서 평지를 이용가능한 토지로 만들었다. 애초에 이 로마광장은 시장으로 이용되었고, 이어서 법정, 공회당등 관공서, 나아가 신전이 세워져서 경제,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말 로마광장 옆에 카이사르 광장, 아우구스투스 광장, 네로 광장, 트라야누스 광장 등 황제들의 광장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 타르페아 벼랑에서 포로로마노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타르페아 Tarpea 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조국을 배반하고 사비니에 성채를 넘겨준 벌로 이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벌을 받았다. 이후로 타르페아 벼랑은 배반자들의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 포로 로마노에는 주요 신전 3개의 터가 있다.

1. 포르티쿠스 데오룸 콘센시움 : 이교도의 12신을 모셨다. 368년 보수작업이 끝났다.

2. 베스파시아노 신전 : 티투스 황제때 착공하여 89년 도미치아누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3. 화해의 신전 : 평민도 호민관이 될수 있도록 정한 피치니오 세스토 스톨로네 법안 제정을 기념하여 기원전 367년 건립되었다. 이 법안으로 '원로원과 민중에 의한 로마 SPQR - Senatus Populusque Romanu - 가 탄생하였다.

원주 8개는 국가의 보물을 보관하던 사투르누스 신전의 잔해이다. 기원전 497년 건립되었고 도리아풍의 원주는 4세기 때의 것이다. 사투르누스 신전 처마 밑 화산의 재단인 풀카날레라는 제철용 도가니가 있었는데, 사비나의 약탈 이후 사비나 왕 티투스 타치오가 맺은 동맹을 기념하여 로물루스에게 헌정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율리아 공회당Basilica Giulia은 중요한 회의 개최, 국가의 공공업무 법률업무 수행을 위한 공간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전리품에서 얻은 수익으로 공회당 건설을 추진했다. 기원전 46년 그의 사후, 정권을 이어받은 양자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완성하고 카이사르에게 헌정하면서 카이사르의 이름Julius(라틴어 Gulia)를 따서 이름 붙였다. 공회당과 세베리우스 개선문 사이 공터에 정치집회를 하던 코미시움이 있다. 이곳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던 정치인 연단이 있다. 'Lapis Niger'라는 이 연단은 원래 로물루스 묘지 덮개였다. 세베리우스 개선문은 203년 그의 아들들 제타, 카라칼라에 의해 헌정되었다. 두 형제는 우애가 두터웠으나, 권력다툼으로 카라칼라가 승리하여 헌정판에서 제타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베스타 신전에서 모시는 불꽃은 나라와 가정에 필요한 불의 영원성을 상징하였다. 191년 마지막으로 재건축된 이 신전 뒤에는 신전을 지키던 처녀들의 숙소가 있었다. 신녀들은 불을 숭고하게 보전할 의무가 있었으며, 의무에 따른 특권이 보장되었다. 베스타 신전 왼쪽에 카이사르 제단이 있었는데, 여기서 카이사르가 화장되었다.

포로 끝 쪽에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모 안토니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이 있다. 기원전 141년 건축되었다. 이후 미란다의 성로렌초 성당이라는 성당이 되었고, 전면은 1602년 건축되었다. 그 외 비너스와 로마 신전이 허물어진 곳에 중세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 곳이 2천년전 카이사르가 활동했던 현장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평범한 민중파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로마에서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벌족파와의 세력다툼에서 패배하여 숙청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카이사르 역시 10대에 살생부에 올라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는 그런 위기속에서도 카이사르에게 항상 인사를 잘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고 가르쳤다. 귀족들 역시 그런 카이사르에 악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카이사르는 40대까지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카이사르는 바실리카 2층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당대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를 상대로 소송을 계속했다. 당시 재판에서 승소하는 쪽이 패소하는 쪽의 재산을 일부 가져갈수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카이사르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크라수스에게 계속 소송을 걸었던 것 같다. 크라수스 역시 당대 최고의 변호사 키케로를 선임하는 등 절대 질 생각이 없었다.

한때 카이사르는 벌족파의 위협을 피해 도망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른 행실, 타고난 언변, 그리고 벌족파와의 혼인을 계기로 43세에 집정관이 되고, 벌족파 권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당연히 벌족파 귀족들의 반발은 거셌고, 벌족파는 카이사르의 정해진 임기 1년이 끝나는대로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모를리 없는 카이사르는 1년 임기 뒤 갈리아 원정을 떠나 7년간의 원정을 눈부신 승리로 장식했다. 로마로 개선 입성을 앞두고 있는 카이사르가 큰 위기로 다가왔던 귀족들은 사령관의 직위가 5년 임기인데 2년이나 더하고 귀국하는 것은 반역의 조짐이라는 핑계를 들어 카이사르의 귀국을 금지한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앞두고 있는 루비콘강에서 '내가 이 강을 건너면 인간사가 비참해질 것이지만, 내가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로마가 비참해질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고 군사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조금 우습지만, 그 비장한 역사의 한장면의 배경인 루비콘강은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냇가였다.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3년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정권을 탈환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는 그의 명언이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에 즉위하여 화폐, 토지 등 전 경제분야에 걸쳐 개혁을 달성한다. 카이사르는 연중 일곱번째 달에 태어나서, 그가 태어난 달은 카이사르의 달, 영어로는 줄라이 July 라고 불렸다. 카이사르의 개혁과 독재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암살계획을 세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공무를 위하여 폼피우스 회랑을 지나가고 있었고, 귀족들은 단검으로 그를 살해한다. 2번째 가격이 급소를 맞췄다. 카이사르는 토가로 얼굴을 덮으면서 암살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럴만한 인물들이 그를 찌르고 있는데,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후계자, 그의 아들, 그와 신념을 같이 하던 브루투스였다.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 너마저' 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라고 했다. 카이사르는 56세에 암살당했다. 시신은 그달에 화장되었으나 뼛가루는 땅으로 스며들어 회수하지 못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그를 화장시켰던 제단에는 아직도 그의 추종자들이 와서 헌화하고 간다.

영웅이 죽으면 나라가 망하는 역사가 많이 있지만, 로마는 달랐다. 카이사르 사후,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잦은 복통과 만성 설사 변비로 유명했던 그의 별명은 배아픈 아이였으나, 부끄러운 별명을 뒤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18세에 공식적인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오른다. 이후 그의 측근, 사위인 아그리의 도움에 힘입어 로마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광장 시스템은 로마가 확장되는 곳에 속속 이식되었다. 폼페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원래 움막에서 생활하던 로마인들은 불과 몇세기만에 대리석으로 된 고층건물을 지었다. 가히 놀라운 발전이다. 이것은 로마의 습득력과 개방성 덕분이라고 보인다. 에트루리아인의 하수도와 같이 선진기술이 있으면 신속하게 습득하고, 폼페이를 해양중개무역도시로 발전시킨 것과 같이 가능성이 있으면 적극 지원하였다. 기원전 502년 공화정으로 시작했던 로마는 서기 27년 제정으로 바뀐후로도 천년동안 살아남았다. 세계적으로 왕국이나 제국이 천년이상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로마와 통일신라 뿐이다. 

 

에밀리아 공회당쪽.

 

 

 

 

 

 

 

 

 

 

 

 

 

 

 

 

 

 

 

 

 

 

 

 

 

 

카스토레와 폴루체 신전 원주.

 

 

 

 

 

 

 

 

 

 

사투르누스 신전(좌)과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신전(우).

 

 

 

 

 

 

셉티미우스-세베루스 개선문.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신전(전)과 산티 루카 마티나(후)

 

 

 

 

 

 

사투르누스 신전.

 

 

 

 

 

 

 

 

 

 

율리우스 공회당Basilica Gulia 잔해.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신전(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중). 산티 루카 미타나(후)

 

 

 

 

 

 

에밀리아 공회당 Basilica Aemilia 과 시장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눈에 띄인 건물 연결통로. 형태가 탄식의 다리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