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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31224 이탈리아 로마 -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

네다 2014. 1. 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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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4 맑음
이탈리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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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칼리스토 카타콤베St Calisto Catacombe

 

로마 외곽으로 나와 카타콤베에 도착했다. 카타콤베는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주변에 약 60여곳이 있는데, 그중 오늘 방문한 곳은 아피아 가도의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St Calisto Catacombe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같은 아피아 가도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 셋테키에세 거리의 도미틸라 카타콤베와 더불어 참배객들이 많이 가는 주요 유적지이다.

 

'카타콤베'라는 말은 고대어로 '드러눕다'라는 뜻의 '쿠바레'와 '무덤'이라는 뜻의 '콤베'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카타콤베' 라는 용어는 원래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에만 적용되었다. 다른 카타콤베는 안식처를 뜻하는 치미테로 cimitero 라 하였다. 고대 로마의 종교는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어 시신은 화장되었고, 성 안에는 묘지를 둘 수 없었다. 시신을 화장하는데 쓰이는 땔감은 부유층만 감당할 수 있어서 돈 없는 서민들은 시신을 매장하였다. 기독교가 확대되면서 교인들은 예수님처럼 땅 밑 바위 속 굴에 아마천 담요로 싸여 묻히는 매장을 선호하게 되었다. 더구나 초기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노예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벽 밖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세를 믿는 종교관의 확산에 따른 매장의 확대, 인구의 증가로 매장을 위한 지상공간은 부족해졌고, 사람들은 점점 깊은 지하에까지 매장하게 된다. 로마 주변 응회암 토질은 손으로 팔 수 있을 정도로 무르지만, 공기에 노출되면 점차 경화되는 성질로 무덤으로 만들기 좋았다. 사람들은 땅을 파고 구멍을 내 시신을 묻었다. 인구가 더 늘어나면서 점차 묘지를 만들기 위한 벽돌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로마의 법에 의하면 묘지란 성스럽고 침해될 수 없는 곳이었기에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지하의 미궁 속으로 피신해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로마 대화재때 시민들 사이에 네로 황제가 직접 한 소행이 아니냐고 소문이 돌자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여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이후 사도바울과 사도베드로가 순교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전 비오크라테우스 황제때 세바스티아노 성인이 화살을 맞고 순교하였다. 죽은 기독교인은 카타콤베에 매장되었다. 당시 카타콤베는 '죽은자들의 도시'(네크로폴리스)라고 하여, 산 자들은 들어가지 않았으며 병사들도 쫓지 않았다. 이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카타콤베로 숨어들어오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다음 기독교인들은 이제 땅 밑에서 밝은 햇볕 속으로 나왔다. 지하에 있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되어 바티칸 관할에 속하는 여러 수도회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공인된 이후에도 카타콤베는 길고 긴 수난과 약탈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로마를 약탈했던 이민족의 침입 때 무덤 안에 있는 귀중한 자료와 보석 등이 훼손되고 도난당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무덤 속에 평소 지니던 귀한 물건을 넣어주는 장례풍습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보더라도 관 뚜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부터는 카타콤베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례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베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이때부터 카타콤베는 역사에서 차츰 잊혀지기 시작했다. 폴리도리에 의하면 지하 묘지들의 총 연장길이는 대략 900㎞이고, 300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무려 6백만 명이 묻혔다 한다. 카타콤베는 사실상 공개된 비밀장소나 마찬가지였다.

 

카타콤베에 매장할 때는 사람이 겨우 누울만한 정도의 자리에 시신을 안치하고 생전에 쓰던 물품을 같이 안치하였다. 그리고 나서 벽을 석판으로 가렸는데, 로마 멸망 이후 거의다 도굴되었다. 석판에는 이름, 순교일자, 묘비명 정도가 써져 있었다. 카타콤베 내부는 공기가 희박하고 너무 건조하여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이다. 기독교 신자들도 예배를 드리거나 1-2일간 긴급하게 대피할 때에만 사용했다. 지하 갱도에서는 횃불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호롱불만 들고 다녔으나, 신자들은 이미 길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이들을 체포하려 들어왔던 로마 병사들중 길을 잃고 어둠속에서 절망에 빠져있다가 구출되어 개종된 병사들이 많았다. 

 

카타콤베에는 죽은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암호가 새겨져있다. 양을 진 착한 목자 형상, X와 P의 결합문자(크리스토스 라고 발음되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닻,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 비둘기, 물고기(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라는 고대어를 약자로 쓰면 익투스가 되는데 이것이 물고기 단어와 비슷하다고 한다) 등이 새겨져있다. 특히 성인 옆에는 성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물고기에게 먹혔다가 사흘만에 살아돌아온 선지자 요나나 이사야의 기적을 그렸다. 또는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선 물결모양을 그리기도 하였다. 5세기 까지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벽화로 그리지 않았는데, 6-7세기경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을 카타콤베에 그렸다. 또한 벽에 '인파체'라는 말이 써져있었는데, 이는 라틴어로 평화라는 뜻이다. 카타콤베에서 발굴되는 석관, 성유담, 금채색의 유리메달 모두 중요한 유물이지만, 특히 벽화는 미술과 도상학 측면에서 중요성이 크다. 애초에는 미적인 대상(과실수, 그리스 신화, 동물, 풍경 등)을 묘사하는 데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상(선한 목자, 사도, 성인, 성서의 설화 등)으로 소재가 확대되었다. 일부 석관 모서리에는 맹수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많은 것들이 도굴되어 건물 장식 등으로 쓰이게 되었다. 석관 자체도 로마 귀족들이 가져다가 수조, 화분, 화단 등으로 쓰게 된다. 부유한 사람은 대리석 석판을 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반 기왓장 석판을 썼는데, 석판의 수요가 많아지자 석판이 만들어진 벽돌공장 상표를 찍어내게 된다. 이 상표는 스타벅스와 비슷한 원형 스탬프 형상이다. 성칼리스토 카타콤베 출구쪽에 이 스탬프가 찍힌 석판을 볼수 있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3세기 때부터 그리스도교 공식 묘지로 지정되어 많은 교황들이 모셔진 곳이다. 박해가 극심하던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제피리누스는 로마의 명문 체칠리아 집안으로부터 이 지역 땅을 희사받아 당시 부제였던 칼리스토에게 관리를 담당케 하였다. 칼리스토 부제는 20년 동안 이곳에서 임무에 충실하며 지내다가 제피리우스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그 자신 순교한 뒤 이곳에 묻혔기에 그의 이름이 이 카타콤베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공적 재산으로서 가장 오래된 이 지하 묘지는 현재 5층까지 발굴되어 있으며, 그 중 한 통로는 2㎞나 뻗어 있을 정도다. 여기에는 폰시아누스, 파비아누스, 식스투스 2세 등 교황들과 성인들의 묘지가 있다. 성칼리스토 카타콤베에 묻힌 시신은 총 10만구 정도로 1800년전에 묻혔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부패한 시신의 뼛조각밖에 없다. 성칼리스토 카타콤베에는 초기 교황 13인의 시신이 다 매장되어 있었다. 그중 폰티아누스 교황의 무덤은 대리석만 남아있고 최근 벽돌로 리몸델링 하였다. 교황의 시신은 구베드로 성당 지하로 이전되었다. 가족방은 최후의 심판의 날 가족들과 같이 맞기 위해 마련되었다. 가족묘는 아치형으로 만들어졌으며 아기묘도 같이 만들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박해를 받은 체칠리아 성녀가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토지를 교회에 봉헌하고 순교한 뒤 이곳에 묻히기도 했다. 17세기 초에 조각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 의해 형상화된 그녀의 조각상이 이 성당에 있는데 성녀의 순교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조각의 원본은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 체칠리아 성당에 있고 여기 있는 것은 모사한 것이다. 체칠리아는 뜨거운 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사당한 뒤 참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체칠리아 성녀는 순교하면서도 계속 성가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체칠리아 성녀는 기독교인을 의미하도록 왼손가락 3개를 붙이고(삼위일체) 오른손을 땅을 가리키고 있는 형태로, 옆으로 뉘여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매장했었다. 1500년이 지난후 체칠리아 성녀의 시신을 발굴했는데, 당시에도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카타콤베 내부 관람시에는 사진 촬영이 제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