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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31225 이탈리아 피렌체 -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네다 2014. 1. 3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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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5 흐림 비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Palazzo Medici Ricardi

 

평범한 중산층 가문에서부터 업종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하고 피렌체를 세계일류로 번영시켰던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역사의 아버지이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378년경의 기록에 공직자의 집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본격적으로는 1400년 조반니 디 비치는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전 유럽으로 사업을 확장하였고, 교황청과의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수반(곤팔로니에레)으로 임명되어 세제 개편과 경제 발전에 힘썼고, 르네상스의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산 조반니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위한 경연에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참가하였다. 

 

조반니 사후 아들 코지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 귀족들과의 경쟁 끝에 추방까지 당했으나, 인기와 자본에 힘입어 다시 권력을 회복한 이후 공화국 발전에 대한 기여로 '국부'라는 칭호도 받는다. 코지모는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교황청 자금을 유통함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다. 그렇게 쌓은 부를 국가에 투입하고, 학예에 투자하며, 미켈로초,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기베르티, 도나텔로 등 유수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의 봉오리를 틔운다. 코지모는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일에서 더 즐거움을 얻는다며 부의 선한 영향력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구현한다.

 

코지모의 손자 로렌초는 '위대한 자'(로렌초 일 마그니피코)라는 칭호에 걸맞게 가문과 국가의 부흥을 정점에 끌어올린다. 로렌초의 외교적 수완은 피렌체를 이탈리아 정치의 중앙으로 이끌고, 그리스 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학문의 수준을 격상시켰다. 인기와 권력의 최고점이 있었던 메디치가에 대한 귀족들의 견제는 점점 더 심해져서 로렌초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는 물론 교황 식스투스 4세와 영합한 파치가에 의해 동생 줄리아노가 결국 비참하게 암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디치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발굴하고,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에 대한 후원 등 명실상부한 르네상스의 주도자이자 프론티어가 되었다. 특히 메디치가의 문예 부흥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진정한 이해 없는 시혜적인 정책이 아니라, 수준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지원이었다는 데에서 위대한 선견지명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로렌초 그 자신도 수편의 시를 노래한 창작자였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들이여, 행복을 즐겨라. 내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Whoever wants to be happy, let him be so: about tomorrow there’s no knowing." 라는 달관적인 시에서 그의 담담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로렌초 이후 메디치가는 권력의 질곡을 겪으면서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등을 배출하고 전략혼인을 통해 프랑스 왕실과의 연결고리도 만든다. 그럼에도 시대의 풍파를 빗겨나지 못하고 1737년 7대 토스카나 대공 잔 가스토네가 사망하면서 혈통이 끊긴다.

 

메디치 가문은 300년간 전쟁이나 다툼이 아니라 순수하게 평화로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학문과 예술의 발전을 통해 한 도시를 당대 최고의 도시이자 후대에까지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피렌체에서 진정한 의의를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르네상스는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인간이 다루는 만물의 중심을 인간 외적인 것으로부터 인간 내적인 것, 인간 본연으로 회귀시킴으로써, 인류역사를 암흑으로부터 구제하고 산업 과학 혁명과 기술 발전 등 세계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던 원동력이다. 메디치가가 마련한 금자탑의 기반은 근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은 코지모 디 조반니 시절,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가 건축한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건물이다. 애초에 브루넬레스키가 화려하고 장식적인 설계를 제안했으나, 코지모는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웅장한 건물은 타인들에게 시기를 부를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세간의 관심을 의식하고 공공성에 부응하려고 하는 거부의 모습은 스놉효과, 베블런효과에 빠져있는 현대사회의 코미디를 비웃는다. 이에 미켈로초가 단순하고 간결한 입방체를 설계한다. 서로 다른 벽면과 창틀로 장식된 3층 건물의 지붕은 상징적인 돌출부(코니스)로 마감되어 있다. 3층은 아무 무늬 없는 민자 벽면에 열을지어 두개씩 엮인 아치형의 창문을 각각 더 큰 아치로 감싸 안았다. 벽돌로 쌓아올린 모양의 2층에는 역시 두개씩 엮인 아치형의 창문을 더 큰 아치로 감싸고 큰 아치 위에도 벽돌로 장식했다. 건물 지상층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회랑(로지아)으로 둘러싸인 중정에는 단정한 정원이 꾸며져 있어 그 옛날 경제활동이 발생하고 가문과 대중이 회합했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1460년 메디치 궁전으로 문을 연 이 궁전은 1494년 사보나롤라의 반란으로 추방당한 메디치가와 이별하고 건물, 가구와 수집품 등을 시에 압수당했다. 1512년 복귀한 메디치가는 건물 중정에 대포를 설치하고 로지아를 폐소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1540년 코지모 데 메디치 1세가 베키오 궁전으로 이주함으로써, 메디치 궁전은 더 이상 메디치가의 주요궁전 역할을 하지 않는다. 1659년 리카르디가가 메디치 궁전에 입주함으로써, 이제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이 된다. 메디치 궁전을 매입한 가브리엘로 리카르디는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리모델링하였으나, 외관은 르네상스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우리집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