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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31228 이탈리아 베네치아 - 두칼레 궁전

네다 2014. 2. 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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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8 맑음
이탈리아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 에 입장했다. 입장권은 16유로나 하지만 두칼레 궁전을 비롯하여, 산마르코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건물 즉, 박물관들을 다 들어갈수 있는 통합입장권이니 그리 비싼것은 아니다. 두칼레 궁전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쉬웠다. 피렌체 베키오 궁전은 10유로에도 사진 잘 찍게 해줬는데. 황금계단을 올라가면 과거 베네치아 도제 Doge, 총독이 사용하던 집무실과 접견실, 회의실 등이 나온다. 도제의 방 Doge's Apartment 는 일시적으로 폐쇄된 상태였다. 

 

두칼레 궁전은 9세기에 최초로 건설되었다고 전해지며, 679년부터 1797년까지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의 총독 관저였다. 베네치아의 총독은 선출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작 선출되고 나서는 평의회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적어도 2명 이상의 의원과 같이여야만 베네치아 외부로 출장이 가능하며, 두칼레 궁전에서의 모든 공식적인 행사 비용을 사비로 감당해야 하는 극한의 극한직업이었다. 돈은 엄청 많고 나이도 엄청 많은 거부가 죽기 전에 돈 다 쓰고 싶을 때 했던 대통령 같은 직업이었나보다.

 

두칼레 궁전은 최초에 투박한 요새 같은 고딕 양식 건물이었다. 칸디아노 4세 시절 반란과 1106년 등 두 차례 화재로 훼손되어 재건하였고, 12세기 도제 세바스티안 치아니가 보수 확장한 데 이어 도제 피에르트 그라데니고 집권(1297년) 이후 1309년 또 증축함으로써 1442년 증축 완공된다. 수 차례 증축 확장과정에서 비잔틴, 르네상스 양식이 결합되어 베네치아 고딕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백색과 분홍색의 대리석으로 장식된 건물은 곧게 뻗은 직선의 남성성과 더불어 여성적인 분위기도 풍긴다. 두칼레 궁전의 두 개의 정문 중 산마르코 대성당쪽 문이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로서 과거 관보 역할을 했던 곳이다.

 

두칼레 궁전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볼거리는 대회의실에 있는 틴토레토Tintoretto의 작품 천국Heaven과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Bridge of Sigh이다. 탄식의 다리는 두칼레 궁전과 수로 건너편 감옥을 잇는 다리이다. 사면을 폐쇄했기때문에 그냥 가면 복도 같다. 옛날 베네치아 시절, 죄수들이 법정에서 선고를 받고 감옥으로 이송되면서 건넜던 다리로서, 창문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던 다리이다. 특히 카사노바Casanova가 다리를 건넜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이 항상 카사노바는 두칼레 감옥을 어떻게 탈출했을까, 하면서 궁금해 한다.('새로운 집'이라는 뜻의 이름조차도 실존인물 같지 않다.) 백작에게 뇌물을 써서 혹은 백작부인과 정분을 통해서 탈출했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카사노바는 그냥 다른 탈옥범들이 탈출하듯이 벽, 엄밀히 말하면 천장을 뚫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탈출했다. 그냥 평범하게 말이다. 개인적으로 카사노바 하면 색마로 단정되듯 폄하되는 것이 좀 안타깝다. 원하는 사람을 누구든지 아군으로 만들수 있는 사교성이 있었고, 때문에 능력있는 스파이였고, 복권사업을 성공시킬만큼 장사수완도 있었다. 이 모든것이 비록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능력은 있었다. 단순히 색마, 색광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다방면 연예인 같은 능력이 아깝다.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 카사노바는 1750년 파리에 도착했다. 망르에서 마을로 옮기면서 그는 오페라 이야기 같은 성적 장난질을 계속했다. 리오에서 그는 비밀스러운 의례에 대한 흥미 때문에, 결정적으로는 인생에서 유용한 것으로 증명된 능력과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다. 프리메이슨은 그에게 가치있는 연락처와 검열되지 않은 지식을 제공하였다. 카사노바는 또한 장미십자회에도 관심을 두었다. 카사노바는 파리에 2년 머물렀다. 언어를 배우고 극장에 다니고 유명인사들에게 그 자신을 소개하며 지냈다. 그러나 곧 그의 수많은 애인들이, 그가 다녀갔던 거의 모든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파리 경찰에 들통났다.

 

그는 1752년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 당시 그는 La Moluccheide 라는 꽤 평이 좋은 연극을 썼는데 지금은 소실되었다. 그후 카사노바는 프라하, 비엔나를 방문하였는데, 도덕적 분위기가 더 강하였던 그곳은 카사노바의 취향이 아니었다. 카사노바는 1753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문란한 행위를 계속해 나가면서, 적들을 양산하고 베네치아 수사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의 경찰기록은 신성모독, 추행, 폭력, 풍기문란으로 점점 늘어났다. 지오반니 마누치Giovanni Manucci라는 감시인이 카사노바의 신비주의, 프리메이슨 행적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의 소장도서를 금서목록으로 지정했다. 브라가딘Bragadin 의원은 심각하게 그에게 당장 떠나지 않으면 극단적인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다음날 카사노바는 30세에 체포되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 귀족들은 그를 '납덩이'에 가두기를 원했다. '납덩이'라는 말은 납으로 지붕을 감싸고 있는 두칼레궁전 동편 꼭대기층에 위치한 7개의 감방을 말하는 것이다. 중형의 죄인이나 정치범들을 가두는 교도소였다.

 

카사노바는 옷 한벌, 초라한 침상 한채, 책걸상이 있는, 어둠과 베네치아의 여름 열기, 그리고 벼룩들이 들끓는 최악의 감방에 갇혔다. 몇달 지나지 않아 감방동료를 사귀고, 브라가딘 백작의 호의로 겨울이불과 좀 더 좋은 음식을 제공받았다.

 

카사노바는 운동시간 동안 검은 대리석 하나와 쇠 막대기 하나를 찾았다. 이후 약 2주동안, 감방 동료들과 같이 있지 않을때, 카사노바는 쇠막대기를 뾰족하게 갈아서, 그의 침대 밑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재판관 사무실이 그의 방 바로 밑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카사노바는 축제가 열려 아랫층에 재판관과 교도관들이 아무도 없을때 탈출하려고 시도했으나, 탈출 시도 3일 직전에 카사노바의 지금 방이 더 행복하다는 탄원에도 불구하고 더 넓고 좋은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나는 인사불성 상태로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굳어버린 동상처럼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았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아예 희망이 없어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일하게 나에게 남은 편안함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카사노바는 다시 타성을 이겨내고, 새로운 탈출계획을 세웠다. 이웃감방의 발비Balbi라는 파계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사노바가 팔걸이의자에 숨겨서 갖고들어온 쇠꼬챙이는 이내, 발비가 교도소장을 속여 넓적한 파스타 접시 밑에 들여온 책에 숨겨져서 발비에게 전달되었다. 발비는 그의 천장에 구멍을 내고, 카사노바의 방 천장에도 구멍을 내었다. 카사노바는 감방동료였던 감시인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미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발비가 낸 천장구멍으로 사라지면서, 카사노바는 쪽지를 남기면서 시편 115편(불가타역 기준)을 인용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신의 위업을 전할 것이다."

 

카사노바는 발비와 함께 안개가 자욱한때에 두칼레궁전의 납판과 지붕을 건너갔다. 바로 수로로 떨어지는 것은 위험했다. 카사노바는 지붕에 난 창을 통해 안쪽 방을 살펴보고 창문을 깨서 진입했다. 지붕에서 발견한 사다리와 방에서 갖고온 '침대보 밧줄'을 이용해서 25피트 밑에 있는 방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궁전 복도, 갤러리들과 방을 지나쳐서 아랫층으로 내려와, 경비들에게 자신들이 공식연회 뒤에 우연히 어떤 방에 갇혀있었다고 속이고 문을 통해 나왔다. 카사노바는 1757년 1월 5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날은 로베르 프랑소와 다미엥Robert Francois Damiens이 루이15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날이었다.

 

일부 의견에 따르면 카사노바의 탈출기를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단순히 후원자에게 뇌물을 건네서 탈출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천장을 수리했다든지 하는 물리적 증거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1787년 카사노바가 직접 서술한 '나의 탈출기'에서 증언했다. "결국 신께서 나에게 탈출에 필요한 것을 주셨다. 기적이 아니라면 놀라운 것일 것이다. 나는 내가 운좋게 성공해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용기에 자랑스러운 것이다."

 

카사노바는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나는 깨달았다.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역량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위대하고 강력한 친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엄격한 자기통제와 카멜레온 같은 가변성을 지녀야 함을." 파리를 다시 찾은 그는 예전보다 성숙했고, 비록 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더 계산적이고 치밀했다. 그의 첫번째 과업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옛 친구이자 지금은 외무장관이 된 베르니Bernis에게 다시 연락했다. 그의 후원자는 그에게 일시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서 국가를 위한 자금을 모아보라고 조언했다. 카사노바는 즉시 최초의 국가복권위원회의 이사이자, 최고의 판매원이 되었다. 복권사업은 그에게 즉시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자금을 모으자 그는 상류사회를 돌며 다시 유혹을 시작했다. 카사노바는 특유의 신비주의로, 그를 마치 수비학의 마법사의 돌을 갖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의 특출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특히 장두프Jeanne d'Urfe 후작부인과 같은 주요인사들을 후리고 다녔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를 속이는 것은 영리한 사람이 할만한 공적이었다."

 

카사노바는 장미십자회원이고 연금술사라고 소개하면서, 퐁피두르 마담Madame de Pompadour, 생제르망 백작Count de Saint Germain, 알램버트d'Alembert, 장자크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과 같은 동시대의 저명한 인사를 찾아다녔다. 마법사의 돌을 찾는다는 둥, 귀족사회에서 연금술이 큰 인기를 끌자, 그런 류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카사노바를 찾는 곳이 많아지고 그 역시 즐겨 찾았다. 그러나 생제르망 백작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기이하고, 사기꾼 중에 가장 뻔뻔하다. 그는 태연하고 태평하게도 자기가 300살이나 되었다고, 그가 우주의 묘약을 갖고 있다고, 그가 아무것으로나 다이아몬드를 만들수 있다고 한다."

 

베르니는 카사노바를 던커크Dunkirk 지역으로 첩자로 보내기로 했다. 카사노바는 신속한 업무처리로 사례를 괜찮게 받았는데, 이 노작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앙시앵레짐과 그가 의지하고 있던 계급에 대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모든 프랑스 장관들은 다 똑같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주머니로부터 돈을 갈취해서 그들 자식들을 먹인다. 그들은 절대적이다. 탄압받은 사람들은 아무데도 믿을데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 부채와 금융혼란은 불가피한 결과이다. 혁명은 당연하다."

 

7년전쟁이 시작되자, 카사노바는 다시 국가재정을 증가시키도록 불려왔다. 그에게 당시 유럽 최고의 금융 중심지이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국채를 파는 업무가 주어졌다. 그는 겨우 8% 할인가로 국채를 판매하는데 성공해서, 이듬해 그의 이익으로만 방직공장을 차릴 정도로 많이 벌었다. 프랑스 정부는 매우 흡족해서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주고 재정부에서까지 일하도록 제안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아마도 그의 방랑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사노바는 최고점에 다다랐으나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는 방만한 경영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대출받았고, 그의 '하렘'에 들어온 여직공들을 위시한 영구적인 애인들에게 그의 부를 지출하였다.

 

그는 또다시 빚 때문에 For-l'Eveque 감옥에 갇혔으나, 두프 후작부인의 탄원 덕분에 4일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후원자인 베니스가 루이 15세로부터 신망을 잃었고, 그의 적들이 더 가까워졌다. 그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머지 소유물을 다 팔아서 네덜란드로 떠났다.

  

 

 

산마르코 동네(두칼레궁전을 비롯하여 산마르코 광장 4면 건물 4개) 16유로.&nbsp; 산마르코 종루는 제외.

 

 

 

 

 

 

 

두칼레 궁전 출구인 문서의 문 Porta della Carta.

 

 

 

 

 

 

 

 

 

 

 

 

 

 

 

 

 

 

 

 

 

사진 촬영이 허용된 공간. 기둥과 기둥장식이 전시되어 있다.

 

 

 

 

 

 

 

 

 

두칼레 궁전 중앙정원, 정원이라기보다는 마당.

 

 

 

 

 

 

 

 

 

 

 

 

 

본격적인 집무실로 들어가는 황금천장의 계단.

 

 

 

 

 

 

 

 

 

 

감옥으로 가는길.

 

 

 

 

 

탄식의 다리에서 보이는 풍경.

 

 

 

  

 

감옥까지 관람을 마치고 건물&nbsp;밖으로 나왔다.

 

 

 

 

 

 

 

 

 

 

 

 

 

 

 

 

 

 

 

 

 

산마르코 광장의 베네치아 가면 노점상.

 

 

 

 

 

석양을 뒤로한 산타마리아살루테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Salute.

 

 

 

 

다시 아카데미아 다리쪽으로 와서 산타마리아 살루테 성당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