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 양윤옥
Arte
9
어느 날 나는 그들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펜을 든 것은 반드시 써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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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죠? 나는 아까 말했던 아버지 쪽 할머니는 전혀 알지 못해요. 그래서 일본의 외할머니는 무척 소중한 존재였죠. 외할머니가 넘어지실 때, 정원석에 머리를 부딪혀버리셨어요. 이만한 정도의 천연석인데, 내가 어릴 때 곧잘 그걸 테이블 삼아 빨간 남천 열매와 잎사귀를 차려놓고 사촌과 소꿉놀이를 하면서 놀았거든요. 그 돌이 미래에 외할머니의 목숨을 앗아갈거라고는...
미타니는 점원이 내온 파에야를 그녀를 위해 덜어주면서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나이의 노인분이라면 어디서 넘어졌더라도 다치셨을 거에요. 네,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내가 자주 놀았던 그 정원석이에요.
요코는 접시를 받아들며 다시금 말했다. 미타니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미리 알았더라면 대처할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건 안 되잖아요. 위험한 장소에 있었나요?
아, 그게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어린 시절에 내가 언젠가 외할머니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그 정원석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놀았다는 것 그 자체에요.
그건... 아.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기로 치면 세상은 노인들에게 위험한 것들 투성이인데. 그런 문제로 자책할 건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자책하는 게 아니라요. 자책하려야 할 도리도 없으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라...
좀 더 간단히 전해질 얘기라고 생각했었는지 요코는 더 설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테이블의 다른 반쪽에서는 한밤중에 먹게 된 많은 양의 파에야를 약간 거북스러워하면서, 도쿄 시내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는 어디가 가장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요코는 그쪽으로 합류해야 하나 하는 기색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마키노는 미타니와 요코의 잔에 레드와인을 따라주고 자신의 잔도 채운 뒤에 적당한 때를 노려 미타니에게 말했다.
요코씨는 기억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닐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마키노에게로 모였다.
외할머님이 그 정원석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어린 시절의 그 돌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예전 그대로가 아니겠지. 아무래도 머릿속에서는 똑같은 돌로 떠오를 테니까. 그렇게 되면 생각날 때마다 괴로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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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사랑의 효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이와 함께 인간이 연애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사랑하고 시은 열정이 고갈보다 '사랑받기에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라는, 10대 무렵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맑은 자의식의 번뇌가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쾌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고독감을, 일이나 취미 같은 장점은 그럴 리 없다고 간단히 위로해 버린다. 그리하여 인간은 단지 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아름다워지고 싶다. 쾌활해지고 싶다고 간절히 꿈꾸는 것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값할 만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없다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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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그런 자신으로는 더이상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단지 추억 속에만 있을 뿐.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듯'한 가슴 속의 공백에는 이제 한없이 쓸쓸함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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