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컬트한 일상
박현주
엘릭시르
92
오히려 영선이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다고, 자기는 별다른 추억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선이 그리워한다는 말에 결혼식에 와서 인사나 전하겠다고 응해주었다.
누구의 말이 사실일까.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사실이 존재할까? 누구에게나 똑같이 인지된느 절대 질량의 관계라는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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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령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세상에 번거로운 일들이 몰리는 사람이 있다면 미령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풍수교실에서 알게 된 미령은 소위 말하는 슈퍼와이프였다. 미령은 전업주부로 치과의사인 남편의 개업을 도와 인테리어를 하러 뛰어다니고 인스턴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 재료만 사서 직접 애들 간식까지 만들어 먹이는 엄마였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문화센터에서 풍수를 배우고 시각장애인용 도서 녹음 자원봉사를 한다. 부동산에도 밝아서 사모님들과 함께 강원도까지 가서 드론을 띄우고 땅을 살펴보러 다닌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먼 친척의 일까지 떠맡아서 여기 대구까지 온 것이다. 미령이 어쩌다 이 일의 책임자가 되었는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네가 땅이며 풍수며 잘 알잖니. 네가 그런 일은 잘 하잖니. 네가 인맥이 넓잖니. 잘한다는 칭찬이 일을 떠넘기는 청탁으로 변하는 시점.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의 괴로움이다. 거기 나까지 취재 욕심으로 얹혀 있어 부담을 주는 게 아닌지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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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우연을 설명하는 다른 이름이다. 정상분포 내에 있는 확률을 넘어선 어떤 사건을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나의 운명론은 언제나 나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를 말할 수 없을 때, '왜'를 탐구하고 싶지 않을 때, '왜'가 따로 있다고 믿고 싶을 때, 나는 그와 함께 누하동을 걸어 내려오면서 이런 나른한 운명론에 잠깐 빠질 뻔 했다. 하지만 '왜'는 운명론자에게도 찾아온다. 왜?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같이 걷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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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내가 든 감정은 피곤함이었다. 지한과 같은 남자가 있다는 발견이 피곤했다. 그는 매력적이고 아내가 있는데도 모르는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 약혼녀가 있다고 해서 다른 여자가 없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윤리에 대한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지한의 옛 처형처럼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따져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런 모든 복잡한 일들을, 지한을 말할 때 윤명의 얼굴에 떠오른 살뜰한 표정을, 지한의 처형이 분출했던 분노를, 그리고 지금 이 두 사람의 정다운 분위기가 모두 내가 모르는 타인의 일이었으면 싶었다. 실상 그들은 내게 타인이나 다름없는 사이였고, 나는 모른 척해도 될 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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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것은 그 모습 위로 겹치는 어떤 여자였다. 그녀는 아까 내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처럼 이미 사라져간 차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디 있었을까. 호텔 마당에 심어놓은 어색한 야자그늘 아래? 아니면 라운지 바의 폭신한 쿠션들을 엄폐벽 삼아? 유리창에 떠오른 얼굴은 아침과는 다르게 파리하고 수척해 보였다. 아침, 저녁, 밤. 해가 하루를 떠나며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를 빼낸 것 같았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띠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 모두 태양의 아이들로, 겨울밤이 되면 유령이 되어 도시를 떠돈다. 유령이 된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가 싶었지만, 진정으로 나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마치 내 등 너머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앗다. 내가 책을 든 손을 들어 주의를 끌려는 찰나, 그 얼굴은 고개를 돌려 호텔 진입로로 사라져버렸다.
뒤를 쫓아갈 마음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책이 주인을 찾아가지 못할 운명인 듯 싶었다. 윤명조차 무대에서 퇴장해버렸을 때 또다시, 지한과 여자를 처음 봤을 때의 유사한 피로함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좀더 커다란, 세상 전체에 대한 피로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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