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180622 <디지털 프롬나드> 서울시립미술관

네다 2018. 6. 2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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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프롬나드>
180612-180815

서울시립미술관

박생광, 이흥덕, 임옥상, 김원숙, 최욱경, 황창배, 이숙자, 유근택, 김종학, 최영림, 이세현, 천경자, 이대원, 이성자, 장욱진, 정서영, 성능경, 김환기, 구동희, 김수자, 이불, 배영환, 노상균, 유영국, 박노수, 김창열, 박서보, 김호득, 황인기, 석철주, 박기진, Sasa[44], 배윤환, 일상의실천, 최수정, 김웅용, 조영각, 조익정, 이예승, 권하윤 

 

서울시립미술관은 개관30주년을 맞이하여 『디지털 프롬나드』展를 선보인다. 1988년 경희궁 구(舊)서울고등학교 터에서 시작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2002년 구대법원터에 건축물 전면부를 보존하여 지금의 서소문 본관을 신축하였고 2004년 남서울미술관 분관, 2013년 북서울미술관 분관 등을 차례로 개관했다.

 

『디지털 프롬나드』展은 먼저 미술관 소장품 4천700여점 중에서 '자연과 산책'을 키워드로 30점을 선별하고,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는 젊은 작가들의 뉴커미션 작업 10점을 한자리에서 보여줌으로써 미술/미술관과 소장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 몰입, 참여를 이끌어내는 전시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제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뇌과학과 신생물학(neo-biology)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시대의 급속한 변화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이번 전시는 역설적이게도 작품과 창작, 그리고 예술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한다. 작품이라는 것은 어떻게 사회를 표상해왔는지, 예술가들은 어떻게 매체를 다루고 작품을 창작하는지,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1961년부터 2017년 사이에 제작된 선별된 소장품 30점을 통해 찾아보고자 했다.

 

전시의 질문은 10명의 뉴커미션 작가들의 신작 작품들을 통해 이어진다. 경험이 고도화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연을 산책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실존적 경험이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가, 미술은 이러한 시각적 표상과 경험들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해석하고, 작품으로 끌어들이며, 반성적으로 성찰할 것인가, 다가오는 미래에도 인간은 여전히 예술을 창작할 수 있는가. 이 시대 젊은 작가들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예술의 변화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또 다른 해석과 재매개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 속에서 미래를 발견하기도 하며, 미래가 이미 현재에 도래해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드로잉, 퍼포먼스, 영상과 같은 전통적 매체부터 음성인식, A.I 딥러닝, 로보네틱스, 위치기반 영상 ‧ 사운드 인터랙션, 프로젝션 맵핑 등 최신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한자리에 보여줌으로써 미디어아트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또한 인터넷 기반의 디지털 네트워크나 소셜 미디어의 광범위한 시각적 영향 아래 비물질화, 분절화, 정보화, 자동화 등의 시각 언어의 변화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디지털 프롬나드』展의 '프롬나드(promenade)'는 '산책'이라는 뜻을 가진 불어다. 이 전시는 관람객들이 서소문본관 2층과 3층의 3개의 전시장과 계단, 그리고 복도로 이어지는 미술관과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이 담고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 속으로 산책하기를 제안한다. 전시는 모두 4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져있지만 각 섹션은 작품에서 가져온 해시태그(#)의 키워드들로 제시된다. 관람객 각자가 자신만의 인덱스를 구성하면서 자유로운 동선과 고유의 해석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함께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작품이 표상해냈던 그 시대의 마음과 온도의 변화들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이자 관람객이 미래의 산책자가 되어 전시에 함께 참여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박기진 <공> 2018
박기진은 여행이나 일상 속의 실제 경험과 상상력으로 엮어낸 허구가 뒤섞인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배경, 장치, 인물, 사건과 상황들-을 대형 설치작업으로 펼쳐낸다. 그는 영상이나 센서와 같은 미디어 요소들을 결합해서 실제와 허구가 혼합된 현실을 은유하는 에세이-장치를 고안해왔다. 신작 「공」은 지름 2.5미터의 비정형 구형이며, 구형 내부에는 대형 스피커와 우퍼로 이루어진 사운드시스템, 땀처럼 흘러내리게 하는 수증기 분사시스템, 무소음 모터와 유압기를 이용한 진동시스템, 그리고 참여 관람객들의 개인 휴대전화로 수집된 사운드를 수집가공해서 중계하는 IT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다. 이 복잡하고 불안정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형을 통해 박기진은 캐빈 캘리의 '통제 불능(Out of Control)'에서 말하는 '태어난 것들과 만들어진 것들의 결합'에 대한 예술적 상상을 시각화시킨다. 그에게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하나의 사물'(object)로 존재하고, 이 하나의 사물을 복잡한 시스템으로 얽힌 거대한 구형으로 의인화하는 과정을 통해 박기진은 이 시대 예술작품이라는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수집된 참여자들의 사운드는 이 거대한 구형에 내장된 사운드-진동-액체의 복합적인 시스템을 통해 전혀 새로운 어떤 것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Sasa[44] <18개의 작품, 18명의 사람, 18개의 이야기와 58년> 2018
Sasa[44]는 설치, 출판, 사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면서 '같은 아이디어가 어떻게 다른 외형의 결과로 귀결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만화책, 신문, 위키피디아 등에서 수집과 조사를 거쳐 가공한 정보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하거나 메타-서사를 교차/조합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신작 「18개의 작품, 18명의 사람, 18개의 이야기와 58년」은 사람과 작품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의 만남, 작품과 역사의 관계, 이야기의 역사성 등을 질문하며, SeMA 미술관과 30년 동안 다양한 접점을 이루는 작품, 사람, 이야기와 역사에 대해 질문하며 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미술관의 소장품이 몇 개의 층위에서 몇 개의 방법으로, 몇 명과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지고, 관객은 이 소장품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관람객 각자가 역사의 프롬나드를 통해 산책하기를 제안한다. 작가는 선별된 소장품 30점 목록으로 작품의 제목과 제작년도를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키워드 검색하여 동일한 년도와 단어로 이야기를 찾았다. 검색이 불가능한 단어를 제외하고 18명의 작가의 작품으로 최종 선택된 18개의 뉴스를 각 작품 제작년도에 태어난 관객을 섭외, 기사를 낭독하고 녹음하여 전시장에 설치하고 낭독한 관객과 해당 작품을 함께 사진 촬영하여 전시한다. 또한 전시장 입구에는 디자이너 슬기와 민과 협업하여 제작한 데이터 그래픽을 벽면에 설치한다.

 

박생광 <무속> 1985

박생광의 작품은 진채기법에 기초한 한국 회화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일본에 머물며 <명량미술전>, <일본미술원전>에 출품하며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활동했지만 원근이 없고, 원색적인 진채기법이 일본 화풍이라는 이유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77년부터는 일본화의 원색적인 요소 보다 고구려 벽화, 신라의 기와문양, 설화, 탱화, 무속화 등 토속적인 소재를 작품에 가미하여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노력했다. <무속>(1985)은 무당으로 짐작되는 인물을 비사실적 비율로 묘사하고, 굵은 윤곽선과 단청에서 가져온 주홍색, 청색, 황색을 사용해서 강렬하게 표현했다. 또한 부적과 '국사당' 현판 이미지를 한 화면에 과감하게 구성함으로써 박생광 특유의 토속적인 작품세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1985년 서울시로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컬렉션으로 관리 전환된 제1호 소장품이다.

 

이흥덕 <카페> 1987
이흥덕은 형상미술계열 작가로 인간의 욕망과 사회 부조리를 특유의 역설적인 유머와 관조적 시선으로 표현해왔다. 작품의 배경으로 주로 등장하는 카페, 지하철, 기차역 등과 같은 장소는 군중속의 고독과 무관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의 어두운 단면을 포착해내는 소재이다. 작가는 작품속의 상황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묘사하고 있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지나치는 현대인을 풍자한다. <카페>(1987)는 출입문이 유일한 통로인 폐쇄적인 공간에서 인물들이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거나 은밀하게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그림이다. 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생활환경이 변화하면서 타인에 대한 무관심, 소통의 단절, 사회적 소외 등의 문제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임옥상 <귀로> 1984

임옥상은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미술의 사회적 민중 미술 모임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회원으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회적 사건들을 작품으로 기록해 왔다. 활동 초기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민족의 역사이자 생명의 원천인 땅이 무분별하게 파괴되는 것을 우려했던 임옥상은 '인간은 결국 땅위의 존재'라고 경고하며 땅을 소재로 삼았다. 그는 땅의 재료적 측면고 사회적 측면을 고찰하면서 1990년대부터 주제를 흙으로 확장시켰다. <귀로>(1984)는 흙으로 캔버스 표면에 형태를 만든다음 그 위에 종이죽을 바르고 섬세하게 떠낸 후 채색한 종이 부조의 기법으로 제작한 회화 작품이다. 부조로 표현된 인물들의 처진 어깨와, 흘러내린 옷자락은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고단함과 꿋꿋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김원숙 <무제> 1990
재미작가 김원숙의 작품은 어떤 특정 사조나 거창한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상징과 은유를 통해 일상의 삶에서 느낀 기쁨, 슬픔, 분노, 행복, 추함 등의 다양한 감정과 내면의 이야기를 작품에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작품에 주로 여성을 등장시켜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는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이다. <무제>(1990)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은 따뜻하게 불 켜 진 집을 뒤로 하고 한 남성이 강위의 외줄을 위태롭게 건너간다. 남성의 어깨 위로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거꾸로 서 있는데, 이들의 복장으로 신랑과 신부임을 상상할 수 있따. 위태롭게 한 곳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맞추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단함을 표현한 자전적 이야기로서 보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최욱경 <생의 환희> 1975
자신만의 독특한 추상 색채 화풍을 정립한 '천재화가'로 불렸던 최욱경은 어린 시절 김기창, 박래현과 같은 유명 화가들들 사사했다. 그녀는 미국 크랜부륵 미술학교에서 석사를 취득한 후 본격적으로 추상표현주의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직관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대한 탐구를 거듭할 수록 허무감을 느꼈던 작가는 점차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형체를 찾아내고자 했고, 단청이나 민화에서 차용한 한국적인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탐구하고 작품에 투영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생의 환희>(1983)는 미국 유학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곡선으로 표현된 형태가 마치 두 사람이 기쁨에 겨워 양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듯하다. 노란색의 밝은 색채가 더해져 즐거움과 기쁨, 생의 환희를 생동감 있께 표현하고 있다.

 

황창배 <무제> 1993
황창배는 197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한국화 분야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화단에 등장했다. 지필묵의 한국화 재료에서 벗어나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이나 유채, 나이프와 손을 이용하는 등 재료와 방법에 구애받지 않는 매체의 실험을 계속했다. '한국화의 테러리스트'와 '신 한국화의 개척자'라는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황창배의 파격적인 작업들은 1980-1990년대 '황창배 신드롬'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소재면에서도 산수, 인물, 화조 등의 전통적을 한국화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를 가지고도 새로운 각도로 대상을 해체하고, 추상과 우연성에 집중하면서 표현의 순수성을 탐미적으로 실험했다. <무제>(1993)는 황창배의 실험정신이 정점에 달했던 1990년대 초의 작품이다. 한국의 전통 문양에서 착안한 꽃과 새를 기호화하고 평면 탐구의 연장선으로 선의 자유로운 확장을 보여준다.

 

이숙자 <2004-6 푸른 보리밭-엉겅퀴, 흰나비 한쌍 I> 2004
'보리밭, 꽃, 여인'으로 대표되는 이숙자에게 보리밭은 곤궁함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상징하는 매개체다. 1970년대에는 보리밭을 그리긴 했으나, 꽃과 여인을 주로 그렸고, 1980년 <맥파-황맥>으로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보리밭이 이숙자의 대표적인 모티브로 자리잡는다. 이후 보리밭을 공간적, 심적 배경으로 삼아 여인의 누드, 꽃, 나비 등을 주제로 등장시키는가 하면, 1990년 말에는 훈민정음과 결합한 보리밭 이미지에 도발적이면서도 당당한 여인의 누드를 그린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4-6 푸른 보리밭 - 엉겅퀴, 흰나비 한쌍 I>(2004)에서 캔버스의 전면을 뒤덮고 있는 보리밭은 암채기법으로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바람의 물결에 따라 흔들리지만 꼿꼿이 견디는 보리밭은 질긴 생명력과 의지를 표상하고, 화면 중간의 들꽃은 삶의 기쁨을 상징한다.

 

유근택 <열 개의 창문, 혹은 하루> 2011
유근택은 일상의 풍경에서 산수의 소재를 찾으면서 1990년대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작가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이었던 전통적인 한국화의 소재에서 탈피해서 친숙한 일상의 공간과 관계 속에서 발견해냈다. 그는 전면 구도와 같은 과감한 화면 전개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이나 풍경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에너지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되는 대상과의 복합적인 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열 개의 창문, 혹은 하루>(2011)는 작가가 1년 동안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머물렀던 집의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바깥 풍경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려낸 연작이다. 동일한 장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담아낸 이 작품은 시간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을 은유하며, 꾸준한 관찰을 통해 완성한 열 개의 캔버스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다채로운 색채의 변화와 함께 보여준다.

 

김종학 <잡초> 1989
김종학은 평안북도 신의주 태생으로 1948년 월남했다. 설악산의 절경과 꽃그림으로 잘 알려진 '설악의 화가' 김종학이 처음부터 설악산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활동 초기에는 서구에서 유입된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과 같은 모더니즘 사조에 경도되었다. '60년 미술가협회'가 덕수궁 벽에 그림을 전시한 일명 <벽전>에 출품한 작품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1979년 설악산 근처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시작된 설악산 그림은 단순히 자연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내재화된 설악의 풍경들을 그려낸 것이다. <잡초>(1989)는 작가 내면에서 피어난 꽃과 잡초들이 비구성적으로 배치되어 마치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잡초, 꽃, 나비 같은 평범한 소재들을 '추상에 기반한 새로운 구상'이라는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표현해냈다.

 

최영림 <전설> 1962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최영림은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이던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한 유화작품이 입선하면서 일찍이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8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현대 판화의 대가인 무나카타시코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홀로 남하했던 최영림의 작품세계는 1950년대 후반 이산의 아픔, 암울한 시대상황, 경제적 궁핌 등의 영향으로 어두운 색채의 추상작업을 선보였던 흑색시대와 1960년대 이후 전설이나 민화의 이미지를 작품에 차용하여 향토적인 서정성을 표현한 설화시대로 나뉜다. <전설>(1962)은 흑색시대의 어두운 추상에서 벗어나 구성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캔버스에 흙과 모래를 발라 토담 같은 표면을 다진 후 유화물감으로 그렸다.

 

이세현 <Between Red 70> 2008
강렬한 붉은 단색 산수화로 잘 알려진 이세현의 <Between Red> 시리즈는 그가 군복무 시절 야간투시경으로 바라본 DMZ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위치한 DMZ는 군사시설이나 인원을 배치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로서 한국전쟁이 낳은 비극의 산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면서 아름다운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다. 아름다움과 슬픔, 남과 북의 분단현실, 한국화와 서양화의 원리 등 그의 작품에는 상반된 요소가 뒤섞여 나타난다. <Between Red 70>(2008)은 붉은 산수화 연작의 초기 작업에 속한다. 후경의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하여 뻗어 나오는 산맥 주변에 농지, 농가, 강가, 정자가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풍경을 묘사하여 보는 이에게 전통적인 한국화의 비원근법적 구도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산봉우리 풍경의 꼴라쥬가 유기적으로 중첩되어 생경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배윤환 <스튜디오 B로 가는 길> 2018
배윤환은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 미술사 속 고전 명화, 영화 속 시퀀스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서 촉발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산발적이고 일화적인 일상에서 시작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초대형 3면화/2면화라는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을 차용하되, 만화책이나 카툰이라는 인접 장르, 캔버스 대신 합판이나 장판과 같은 소재를 믹스 매치함으로써 전통적인 회화의 클리세를 비껴나간다. 신작 「스튜디오 B로 가는 길」은 배윤환이 직접 쓴 단편소설 「오두막」을 모티브로 그림 한 장, 오브제 하나까지 모두 직접 그리고 만들어서 완성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애니메이션의 전개는 창작의 과정만큼이나 복잡하고 불안정하며 쉼 없이 변한다. 작가가 빚어놓은 '마음 덩어리'들이 놓여있는 작업실은 애니메이션 속에서 도박장, 지옥, 수련장, 놀이터, 동굴과 같이 그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작업실을 향해 가는 여행(모험) 속에서 벌어지는 생성, 실패, 실망, 환희, 좌절, 도달, 종결, 시작과 같은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마음의 덩어리들의 생성과 이동에 대한 기록이다.


일상의 실천 <Poster Generator 1962-2018> 2018

'일상의실천'이라는 스튜디오의 이름 그대로 현실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디자인적 실천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낼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노동 잡지 『워커스(Workers)』, 난민문제, 세월호, 촛불집회 등 실천의 현장에서 디자인적 참여의 방식을 함께해왔다. 신작 「Poster Generator 1962-2018」은 선정된 소장품들을 관람객들이 참여해서 새로운 포스터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제공하는데, 소장품과 관람객이 만나서 재해석되며 새로운 작업으로 탄생하게 하는 과정 전체를 디자인한다. 이것은 하나의 디자인 작업이 완성되는 과정을 은유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공간 전체가 참여자의 행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캔버스다. 큐레이터 혹은 평론가의 관점으로 기술된 소장품에 대한 작품해설 중에서 작품의 색채, 구조, 표현기법 등을 카테고리화 하여 키워드를 도출하고, 각 키워드를 반영할 수 있는 이미지 변환 필터를 적용함으로써 참여하는 관람객들 각자가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이 새로운 변환의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대화가 음성 인식 시스템을 통해 시각화되어 공간 속에 텍스트로 표현된다. 이미지가 특정 단어(요구)에 의해 변환되고 대화의 내용이 텍스트(의사소통, 타이포그래피)로 표현되는 공감각적인 공간을 구현해낸다. 여기서 포스터(poster)는 텍스트를 이미지화 시키는 과정을 공유하는 매개체이자 관람객 각자의 내적 심상을 대표하는 각자의 포스터이며, '포스트 제너레이터(post generator)'와의 언어유희를 통해 AI시대 디자인의 존재 방식에 대한 질문까지 담아낸다.

 

최수정은 회화를 기반으로 설치나 오브제와 같은 매체를 결합시켜왔다. 캔버스이라는 전통적 회화의 조건(평면성)과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메타-회화적 방식들을 고민함으로써 캔버스 자체가 하나의 물리적인 오브제로 설정하는 확장을 통해 공간과 회화, 그리고 내러티브와 그 내러티브를 작동시키는 이미지의 사이를 탐색해왔다. 신작 「불, 얼음 그리고 침묵」은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접촉과 부재, 시각기계와 청각기계, 매체와 정보, 기억과 죽음, 0과 1, 생성과 소멸 등과 같이 '불과 얼음'처럼 서로 상반되는 대립 쌍들의 변주를 가져온다. 최수정은 그리스 신화를 현대의 매체 환경에 대입함으로써 정보의 유한성, 인간의 기억과 죽음의 문제, 인공기억의 삭제 가능성, 그 모든 과정에서 존재하는 변이, 오류, 돌발, 왜곡, 간섭 그리고 잡음을 문명과 자연의 쓰레기장, 소멸과 생성의 중간지대이자 잡음과 침묵이 오가는 유적지-패총(선사시대의 쓰레기장, 조개 무덤)으로 만들어낸다. 점멸하는 눈의 빛(시각기계-나르키소스)과 목소리(청각기계-에코)가 동시에 접촉하는 표면은 화석을 연상시키는 조개들과 오랜 역사의 매체들이 파편적으로 섞인 소음으로 가득 찬 퇴적된 조개 무덤이다. 회화를 주매체로 사용하는 작가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김웅용은 고전영화, 뉴스 등에서 가져온 파운드 푸티지나 사운드를 자신이 연출한 영상과 조합, 편집함으로써 보이는 세계 저편의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영상작업을 선보였다. 특히 사운드, 커트, 색채, 시퀀스, 오브제 등의 요소들을 분해해서 과감한 콜라쥬 재배치를 통해 기묘한 서사를 시각화한다. 신작 「데모」는 3채널 영상으로 2명의 게이머가 1인칭 시점의 FPS(First-Person Shooter) 데모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하기 위해 접속해서 1970년대 초 일본 적군파의 활동과 그들의 하이재킹 미션을 구현/실패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 작품이다. 적군파 멤버들은 세계혁명과 단일하며 평등한 세계를 구현하겠다는 목표로 당시 북한에 가서 혁명 군사훈련을 받고자 했다. 그들이 장난감 총을 소지하여 비행기를 탈취하고 김포공한 관제탑에서의 교신교란을 통해 북한이 아닌 남한 김포공항에 착륙했던 당시 뉴스를 교차 편집한다. 가상성과 산화를 통한 낭만적 신체를 동경한 모순적 존재인 적군파의 세계관이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하고 공간 시뮬레이션 데모 게임 속에서 되살아나게 된다. 뉴스릴 속 남아있는 과거의 사건과 2018년 현실의 공항, 게임 속 시뮬레이션 공간. 그리고 3D그래픽의 중층적 교집합은 과거의 적군파 활동과 FPS게임의 전개 과정을 유영하는 몸과 파편화된 몸, 그리고 몸의 변환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마우스나 터치스크린을 누르는 반복적이고도 하찮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결국 버튼을 누르거나 방아쇠를 당기는 결정적 움직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오픈소스 프로그램은 시한폭탄처럼 시간이 지나면 파기된다.

 

조영각은 기계와 시스템의 작용 속에서 산출되는 새로운 경험과 디지털 감수성을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선보여 왔다.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이슈에 대해 시스템 안과 밖에서 위치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최신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결합하여 탐색한다. 신작 「깊은 숨」는 인공지능 딥러닝, 로보네틱스, 빅데이터 등 최신의 첨단 기술의 요소들을 예술 작품(선별된 시립미술관 소장품) 속으로 끌어들여 다가오는 미래에 인간과 사회, 기계 사이의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항을 실험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크게 소장품의 인공지능 학습, 빅데이터의 입력에 의한 로봇암 퍼포밍, 관람객의 비디오 이미지 인터랙션이라는 3가지 최신의 기술적 요소가 하나로 결합하면서 전면 5미터 크기의 영상으로 투사된다. 시립미술관 소장품은 인공지능 딥러닝 중 Chainer fast neural network algorithm이라는 이미지 학습 프로그램으로 색채와 패턴 등의 요소에 따라 이미지가 학습되어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되고, 전시장의 로봇암에 부착된 카메라를 통해 수집되는 관람객의 비디오 인터랙션과 이미 입력된 빅데이터와의 결합과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통해 작가는 우리 앞에 펼쳐진 거대하고 촘촘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그 어딘가에 새로운 생산자의 발현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

 

조익정은 개인이 체감하는 정서와 균열, 갈등 상황들을 이야기를 덧입힌 '극'으로 제작하고 인물이 주체가 되는 퍼포먼스 공연이나 그 과정을 촬영, 편집한 비디오 작업으로 선보여 왔다. 사용된 소품과 무대는 자신의 만들어낸 극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한다. 신작 「올드 스폿」은 조익정이 2016년부터 진행해 온 작업 「스폿」의 연장선에 있되 새로운 3채널 퍼포먼스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설명한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 버리고 싶은데, 갖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와 엮여서 생의 한 부분을 함께 해야 하는 것, 짐스러운 것. 이런 사물을 갖고 있을 때 나는 그 사물을 어떻게 대하는가. 언제까지 내 책임 하에 관리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들이 있나. 「올드 스폿」은 사물의 보존에 대한 복잡하고 애매한 입장을 담아냈다. 영상에는 국가 혹은 기관의 차원에서 보호 중인 박물관의 유물과 미술관의 소장품 그리고, 개인이 간직하고 있는 유품과 먼 곳으로 떠나는 친구가 주고 간 옷 등 가지각색의 이유로 보존중인 사물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사물의 보존을 둘러싼 이야기는 오래 묵은 감정, 오래 끌고 온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고, 관객들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서로 다른 추측과 해석을 할 수 있다" 조익정의 작업은 끊임없이 공적인 보존(미술관 소장품)과 사적인 간직(개인적인 사물/관계) 사이를 오가며 질문한다.

 

이예승은 영상, 오브제,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작업한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혼동하게 하는 거대한 미디어 설치 작업을 통해 동시대를 바라보는 인간의 인지 방식과 미디어 환경 속에서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신작 「중간 공간」은 평면과 입체, 물질과 비물질, 있음과 없음, 디지털과 아날로그, 시간과 공간, 주체와 객체 사이의 중간 공간을 탐색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설치 작품이다. 산점투시나 삼원법과 같은 동양화의 전통적 조형 원리가 동시대 미디어 환경과 어떻게 맞닿아 있으며 이를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서양적인 원근법과는 달리 동양적 산수화는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을 한 화면 속에서 시점이 이동되면서 다층적으로 중첩되어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동시 다접속,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의 모호성, 데이터의 자유로운 조작과 압축 등과 같은 최신 인터넷 네트워크나 데이터의 특성과 연결된다. 이 작품은 산수화의 필치, 준법, 제관과 같은 동양화 형식들을 차용해서 전통적 산수의 풍경을 미디어 조각으로 분절해낸다. 자연합일의 통합적이고 이상적 자연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전통적 동양화에서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은 때로는 파편적이고 산발적인 동시에 그 모두를 아우르며 총체적이 되는 상반성을 가진다. 관람객은 작가가 새롭게 환기시킨 동양적 자연 개념을 미디어 설치의 인터랙티브 속에서 감각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권하윤은 정체성, 이주, 지정학적 이슈 등의 사회적 의제를 VR, 3D애니메이션, 단편 필름 등의 매체를 이용하여 암시적이고 우회적으로 시각화한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상의 공간과 접속하는 낯선 경험과 상상을 펼쳐내면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객관적 진술과 허구적 해석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신작 「그 곳에 다다르면」은 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2009)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을 모티브로 하여 위치 센서를 이용해서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영상 프로젝션과 사운드가 실시간 반응하는 디지털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이다. 안평대군이 어느 날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을 꾸고 난 후 자신이 꿈에서 풍경을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한 것에서 시작된 몽유도원도의 풍경, 이 오래된 이야기 속 풍경은 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와 겹쳐지면서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의 공간, 임시적이고 불확실한 상상을 거닐 수 있는 실제의 공간으로 전시장에 펼쳐낸다. 가로 5미터 세로 15미터로 길게 이어진 전시 공간을 따라 산책하면 겹쳐진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이 관람객이 다가서고 멀어지는 동선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석철주가 「신몽유도원도」를 통해 물감과 맹물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누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마음의 산을 지워나가면서 그렸듯이, 권하윤이 만드는 디지털 풍경 역시 0과 1의 점멸 속에서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해 다가서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행위로서의 예술을 상기시키고, 그 산책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