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매일 갑니다, 편의점

네다 2019. 3. 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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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갑니다, 편의점(어쩌다 편의점 인간이 된 남자의 생활 밀착 에세이)

시공사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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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은 <율포의 기억>에서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로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운을 뗐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이는 것들 /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 사람들은 왜 무릎을 꿇는 것"인지,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하는 것인지,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인지, 그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라 기억했다. "물 위로 집을 짓는 새들과 /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 먹이를 건지는 /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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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지하철 보행 통로를 지나다 간이매점에 있는 온장고 내부를 살펴보곤 경악한 적이 있다. '실론티'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겨울철이 다가오면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온장고에 넣어도 되는 제품과 안 되는 제품을 사진까지 첨부해 전체 가맹점에 알려준다. 그때마다 늘 '금지 1순위'로 꼽히는 제품이 실론티다. 경력이 짧은 점주들은 홍차 음료니까 실론티가 온장고에 들어가도 되는 줄 안다. 그래, 실론티는 헷갈릴 수 있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지하철 역사에 위치한 그 매점에서는 숙취 해소 음료인 컨디션과 여명까지 온장고 한 칸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편의점을 하는 사람이라 남 일 같지 않았다. 당장 꺼내야 한다는 직업병이 도졌다. 매점 안을 들여다보니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오지랖 본능을 한껏 발휘해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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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터득한 연기력의 대부분은 '공감의 표정을 짓는' 기술이다. 매장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게 손님 탓인지 우리 탓인지 따지지 않고, 어쨌든 "화가 많이 나셨겠네요"라거나 "걱정이 많이 되시겠습니다" 혹은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라고 운을 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이건 동감同感이 아니라 공감共感의 메시지다. 동감은 상대와 견해와 입장에 대한 동의와 찬성을 전제로 하지만 공감은 그와 상관없이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그럼 아무리 화가 난 사람이라도 차츰 진정이 되더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다툼은 보통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너와 나는 생각이 달라'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내가 일단 기분이 나빠'의 문제인 것이다. 당면해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이성을 되찾으라 호소해봤자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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