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세계The Gone World
톰 스웨터리치Tom Sweaterlich / 장호연
허블
92
어렸을 때 모스는 어머니가 그저 술만 마시는 망가져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녀 또한 상처를 받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누구든지 성인이 되면 똑같은 수렁에 빠지고, 그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타인의 상처를 더 쉽게 알아보는 법이다.
142
"우리는 5,000년 미래 세계로 갔습니다." 은조쿠가 말했다. "내가 본 것은... 한마디로 경이로웠어요. 그런 경이로움은 앞으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대양이 꿀처럼 걸쭉했습니다. 550억명이 넘는 사람들과 사막, 모든 것이 온통 모래로 뒤덮여 있는 세계였죠. 옛 도시들은 무너지고 새로 건설한 도시들이 있었는데, 도시 전체가 검은색 피라미드 모양으로 지어졌습니다. 수백만명이 어깨로 피라미드를 떠받쳤고 그들은 피라미드 그늘에 살았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짊어진 도시 아래에서 태어나고 살다 죽었습니다. 도시를 옮겨 다녔고 물을 찾아 떠돌아 다녔습니다. 아래 사람들은 피라미드 안에서 사는 왕족들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와 쓰레기로 연명했죠. 굶주리고 헐벗은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터미너스가 자비로운 처사였을 수 있겠네요." 내가 말했다.
은조쿠는 몽상에서 깨어났다. "부자들은 잘 지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 안에는 쾌락정원과 동굴, 분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래전 잃어버렸던 아이들이나 탕아처럼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치료비용을 댈 수만 있다면 못 고칠 병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예 몸을 벗어던지고 빛의 파동으로 살며 불멸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죽지 않게 되자 불멸의 사람들은 오히려 죽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삶이란 의미가 없으니까요. 예전에는 지옥이 신의 부재라고 생각했지만, 죽음은 신의 부재입니다."
156
코트니가 죽고 난 후 너무 외로웠던 나는 어머니의 관심을 원했다. 어머니가 상실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멀리 있었고, 어머니의 삶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딸이 닻이 풀린 배처럼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맥그로건네에서 밤늦도록 어울렸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있지 않았던 거라고, 결국에는 그녀가 그를 밀어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결국 원망으로 바뀌었고, 나는 어머니를 떠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떠났을 때도, 결국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녀 삶의 모든 것이 그녀를 포기했음에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녀를 포기했을 때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는 것.
295
"죽은 자들은 산 자들보다 그 수가 많다." 네스터가 말했다.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 새로운 육신, 빛으로 된 육신을 받는다고도 하셨어요. 신으로 다시 태어난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죽은 자들은 새 육신을 받을 겁니다."
446
"사슬을 끊어야 하니까. 터미너스로 이어지는 모든 연결고리를 잘라야 하지 않겠어? 우리의 사고방식이 가진 오류를 덮기 위한 처방일 뿐이라네. 모든 인간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 자신이 실재한다고 철썩같이 믿는다는 거네. 자신이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그렇게 믿지. 우리가 보는 모든 것,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하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진짜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하지만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야. 우리는 그저 환상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 뿐이야...."
448
"우리는 우리의 메아리를 마주하네. 우리와 우리 메아리들은 서로 끝없이 반란을 일으키지. 자네도 보게 될 거야. 자네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그를 보면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돼. 안 그러면 자네가 죽게 될거야. 주인 자리가 뒤바뀌는 거지."
471
크리켓우드 코트에 있는 코트니 집에 머설트 가족이 살았다. 언젠가 코트니 김이라는 수사관이 '리브라'호에서 일어난 반란을 조사할 것을 알았기에. 그러니 내가 그녀를 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나 자신이 촉발시켰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났지만, 이제 차가운 슬픔이 나를 휘어잡았다. 한순간 모든 존재가 본래 모습을, 숨기고 있던 잔혹한 목적을 드러내는 듯했다. 지금의 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거대한 영향을 끼쳤던 여러 죽음의 전모가, 그 숨겨져 있던 거대한 아이러니의 패턴이 비로소 드러나는 듯했다. 내가 친구의 이름을 사용해서 친구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느꼈던 이 모든 비극과 희열의 조화는 나의 좁은 마음으로는 결코 잴 수 없는 거대한 설계의 일부처럼 보였다. 모든 행동과 결과가 고리처럼 얽혀 딱 들어맞는 계획으로 여겨졌다. 한순간 코트니의 죽음이 소름끼칠 만큼 확실하게 이해되었으며, 목적과 이유가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다시, 맞춰졌다고 생각했던 조각들이 흩어졌다. 거대한 설계 따위는,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코트니의 죽음은 지극히 우발적이고 평범한 것에 불과했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사악한 행위였을 뿐이다. 설계 따위는 없다. 우주는 잔혹한 계획을 짜는 존재가 아니다. 우주는 광대하고, 우리의 욕망에 아무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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