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Exhalation
테드 창Ted Chiang / 김상훈
엘리
27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세월의 문'을 이용한다는 것은 결과를 모른 채 제비를 뽑는 행위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궁전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을 닮았습니다. 정상적으로 복도를 거쳐 가는 것보다 더 빨리 목적하는 방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 말입니다.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 방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까?"
"회개와 속죄는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유감이군요. 제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미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 뿐입니다."
86 숨
설령 이런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119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글쓴이 : 나탈리 밴스
우리 디지언트 코코는 한 살 반 먹은 롤리인데요, 최근에는 하루종일 말썽만 부려요. 내가 하라는 일은 절대 안 하는 통에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몇 주 전만 해도 정말 귀염둥이였는데. 그래서 당시의 체크포인트로 돌아가 다시 복원해보았지만, 오래가지를 않아요. 지금까지 두 번 그래 봤는데, 매번 말썽꾸러기가 된답니다.(두번째는 그래도 좀 오래갔지만.) 혹시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이 있나요? 특히 롤리를 키우고 있는 분의 의견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피하려면, 얼마나 앞까지 되돌려 놓아야 할까요?
글쓴이 : 애나 앨버라도
저도 똑같은 경험을 해봐서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아요. 하지만 롤리만 그러는 게 아녜요. 수많은 디지언트들이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장벽을 피해 가려고 계속 노력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장벽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럼 결국 절대 철이 들지 않는 디지언트에게 몇 달을 허비한 것으로 끝이 나고 말겠죠. 하지만 상황을 뚫고 나갈 수도 있어요. 그러면 장벽 너머로 나왔을 때 예전보다 조금 성숙해진 디지언트를 갖게 되겠죠.
137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마스코트들은 충분히 훈련을 받은 터라, 게임을 시작해도 좋다는 애나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좋아, 다들 시작해." 애나의 말에 모두들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을 향해 달려간다. "그럼 나중에 봐."
"싫어." 잭스가 이렇게 말하고 멈춰 서더니 그녀의 아바타를 향해 걸어온다. "놀이 싫어."
"뭐? 놀이가 싫을 리가 없잖아."
"놀이 싫어. 일자리 줘."
애나가 웃는다. "뭐? 왜 일자리를 달라는 거야?"
"돈 벌려고."
애나는 이렇게 말하는 잭스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무룩하다. 그녀가 좀더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돈이 왜 필요한데?"
"나 아냐. 애나 주려고."
"왜 나한테 돈을 주고 싶은 건데?"
"애나가 돈 필요하니까." 잭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내가 돈이 필요하다고 한 적 있었어? 언제?"
"지난주 나 말고 왜 다른 디지언트하고 놀아주는지 물어봤어. 애나가 놀아주면 다른 사람들이 돈 준다고 했어. 나도 돈 있으면 애나한테 줄 수 있어. 그럼 애나 나하고 더 놀아줄 거야."
"잭스" 그녀는 한 순간 말을 잃는다. "넌 정말 착하구나."
141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지금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지만, 혹시 롤리 입양할 생각 없어?" 롤리가 임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 수 있다면 정말 흥미로울 것이다.
"없어." 로빈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디지언트는 이미 졸업했거든."
"졸업했다고?"
"현실 존재와 대면할 준비가 됐어. 무슨 뜻인지 알지?"
애나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글쎄."
"여자는 아이 낳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얘기 있잖아. 지금까진 그게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냐." 로빈은 황홀경에 가까운 표정으로, 거의 독백하듯이 말하고 있다. "고양이, 개, 디지언트.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정말로 돌봐야 하는 것들의 대용품에 불과해. 너도 언젠가는 아이의 의미를,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거고. 그러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렇게 되면 예전에 느꼈던 모든 감정은 사실..." 로빈이 문득 말을 멈춘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이제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뜻이야."
동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는 소리다. 동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승화된 것이라는 식의 주장. 이런 고정관념은 정말 넌더리가 난다. 애나도 아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인생에서의 다른 모든 성취를 평가하는 잣대는 아니지 않은가. 동물을 돌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고, 아무런 변호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엿한 직업이다.
212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디지언트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은 진짜이고, 여러분에 대한 그들의 감정 또한 진짜가 아닌가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디지언트가 성적이지 않은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인간과 디지언트 사이의 성적 관계는 왜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건가요?"
..."이 계약이 체결된다고 해서 여러분 디지언트의 복제가 뭔가 다른 게 되는 걸 저희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디지언트는 정말 놀라운 존재이긴 하지만 돈이 되는 직업 능력이 없고, 훗날 그걸 습득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달리 어떤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시려는 거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까. 애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하라는 얘긴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디지언트들에겐 그 어떤 강요도 없으리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군요. 경제적 강요조차 없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이 가짜 성적 욕망을 파는 거라면 더 저렴한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사업의 목적은 전적으로 가짜 욕망의 대체품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저희는 쌍방이 즐기는 경우가 훨씬 낫다고 믿습니다. 경험으로서도 그쪽이 낫고, 사회를 위해서도 그쪽이 낫습니다."
226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잭스의 결정이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잭스는 연애 관계를 맺거나 직장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 둘 다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돼. 아마 영원히. 따라서 그런 식으로 일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난 잭스가 그 방면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기를 원해. 일단 그런 경험을 쌓은 뒤라면, 내가 정말로 반대하긴 힘들어지겠지."
"아." 데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르코하고 얘기할 때 그 생각이 떠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경험을 쌓는다는 것은 디지언트를 성적인 존재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판매할 의도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다면 뉴로블래스트를 이식한 후라 해도 유저 그룹 입장에서는 또 비용이 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물론 그래. 하지만 디지언트에게 성을 부여하는 걸 서두를 필요는 없어. 제대로 그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아."
성인 연령을 너무 낮게 잡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높게 잡는 쪽이 바람직하다. "그럼 그때까지는 우리가 돌봐야 한다는 얘기로군."
"맞아! 그들에게 뭐가 필요한지가 우선이야."
234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잭스를 키우기 위해 그녀가 보낸 세월은 단지 잭스를 재미있는 대화 상대로 만들거나, 잭스에게 취미나 유머 감각만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이 세월은 엑스포넨셜 사가 인공지능에서 추구하는 모든 특질을 잭스에게 부여했다. 현실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창조성,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 있는 판단력을, 인간을 데이터베이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특성은 예외 없이 경험의 산물이었다.
애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블루감마 사의 방침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올바른 것이었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교사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247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물론 잭스의 미래에 순조로운 항해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길에는 여전히 끊임없는 장애물들이 가로놓여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와 잭스는 그것들에 맞설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애나는 잠시 감미로운 몽상에 잠겼다. 성공한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애나는 잭스가 리얼 스페이스와 현실 세계 양쪽에서 몇 년에 걸쳐 성숙해가는 상상을 한다. 법인화 해서 권리를 얻고, 취직해서 생계를 꾸리는 상상을 한다. 충분한 자금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필요할 경우 새로운 플랫폼으로 스스로를 이식할 수도 있는 디지언트 서브컬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상상을 한다. 디지언트와 함께 자라난 새로운 세대의 인간들이 잭스를 포용하고, 애나의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을 통해 디지언트들을 잠재적인 연애 상대로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논쟁을 벌이고 타협하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희생을 감내하는 상상을 한다. 쉽지 않은 희생도 있겠지만, 쉬운 희생도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희생은 기꺼운 법이므로.
이런 식으로 어느새 몇 분이 흘러간다. 상상은 이쯤에서 멈추자. 잭스가 그런 일들을 모두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잭스가 그런 일에 도전할 기회를 얻으려면 애나는 지금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 잭스에게 살아가는 법을, 최선을 다해 가르치는 것이다.
254 데이시의 기계식 보모
데이시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은 악덕에 물들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아를 맡기는 사람들의 영향력을 받고 악덕에 물든다. 이성적인 육아는 이성적인 아이들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데이시가 아이들은 마땅히 부모 손에 키워져야 한다고 단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은 빅토리아 시대의 아동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325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사베는 이렇게 말하며 지징기의 가슴을 툭 쳤다. "종이로 너무 많은 걸 배운 나머지 티브족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잊기라도 한게냐."
...유럽인들의 평가 보고서는 '보우'였다. 그것은 꼼꼼하고 정확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씨족에 합류할지 선택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의향에 맞는 것이어야 하므로 '미미'여야 했다. 그리고 '미미'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장로들뿐이었다. 샹게브 씨족에게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서기로서, 그는 부족 법정에서 사베가 내리는 판결을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글로 기록해둔 다른 노트들까지 보존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앞으로는 요리를 할 때마다 그것을 뜯어내 불쏘시개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329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그리고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과거의 여러 시점에서 틀린 적이 있고, 잔인했거나 위선적으로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일들 대부분을 망각한다. 바꿔 말해,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 거의 모른다..."난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아. 과거에도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러나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341 거대한 침묵
힌두교 신화에 의하면 우주는 '옴'이라는 하나의 소리와 함께 창조되었다. 이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과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을 포한하는 음절이다.
항성들 사이의 우주공간을 향해 있을 때,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은 희미한 허밍 음을 포착한다.
천문학자들은 이것을 '우주 배경 복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백사십억 년 전에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 폭발의 잔류 전자기파이다.
관점을 바궈 이것을 그 때 그 '옴' 소리의 희미한 반향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음절의 울림은 너무나도 깊었기에, 이 우주가 존재하는 한, 밤하늘은 계속 그렇게 진동할 것이다.
아레시보는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을 때는 창조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 푸에르토리코 앵무들에게도 고유의 신화가 있다. 인간의 신화보다는 인간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슬프게도 우리의 신화는 우리 종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가 멸종하기 전에 인간들이 우리 언어를 해독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그런 연유로, 우리의 멸종은 단지 한 무리의 새들의 멸종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우리의 언어와 의식과 전통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 목소리가 소거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은 나와 동포들을 멸종 직전까지 내몰았지만,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 종은 더 이상 오래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명을 다하지 못하고 '거대한 침묵'에 합류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떠나기 전, 우리는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아레시보에 있는 망원경이 그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잘 있어. 사랑해.
390 옴팔로스
신의 의도를 달성하려는 욕구에서가 아니었다면, 태초의 인간들은 왜 문명 건설에 나섰던 것일까요?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의식주를 확보하는 것으로 족했을 텐데, 그들은 왜 그 이상의 것을 향해 나아갔던 것일까요? 당신의 뜻을 이행할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왜 오늘날 인류를 규정하는 모든 예술과 과학기술을 발명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설을 하나 세웠다.
...그러나 우주 창조의 순간은 모든 인과 관계가 끝나는 지점이다. 과거를 추론하는 것은 이 순간까지만 가능하고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해진다. 우주 창조가 기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은 그 이전에 일어난 일들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윌헬미너가 가지고 있던 그 태초의 조개껍질은 무엇인가를 입증해주는 증거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신의 계획의 증거가 아니라, 기적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우주 창조와 마찬가지로 인과의 사슬로 고정되지 않은 또 다른 범주의 사건들,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일종의 기적이다. 진정한 선택을 하는 경우 우리는 물리법칙의 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결과를 일으킨다....
...기적은 일어나며, 인간의 선택 또한 틀림없이 그 일부이다.
나는 태초의 인간들이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가능성들로 가득 찬 세계에 내던져졌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선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단지 살아남는 일에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대신 스스로를 향상시킴으로써, 이 세계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우리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증거로 여겨왔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주여, 저는 지금껏 제 삶을 우주라는 경이로운 메커니즘의 연구에 바쳤고, 그 과정에서 큰 성취감을 얻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당신의 의지와 저를 만든 당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해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느낀 성취감은 순전히 저의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제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도 탄생시키면 육성해야 한다. 출산, 육아, 애착, 프로그램(IT 생태계)의 흥망성쇠, 교육(성교육), 자아 발견, 독립(정신/신체적), 부모의 고민, 진정한 사랑(희생),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희생한다는 오래된 진리 등이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버무러진 작품이라니. 글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인데, 녹아 있는 메시지와 여운까지도 가슴을 때린다.
테드창의 작품을 대작에, 테드창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야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아주 원초적인 수준에서 마음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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