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나폴리 4부작 | 나의 눈부신 친구L'amica geniale

네다 2020. 12. 17. 21:28
728x90

나폴리 4부작

나의 눈부신 친구L'amica geniale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 김지우

한길사

137

"우린 아직  친구지?"

"그럼."

"그럼 내 부탁 좀 들어줄래?"

릴라와 다시 가까워진 그날 아침, 나는 릴라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집에서 도망칠 수도 있고, 동네를 떠나 농장에서 잘 수도 있고, 나무 뿌리로 연명할 수도 있었다. 수챗구멍을 지나 하수구로 내려갈 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더라도 집에 되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 별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순간에는 약간 실망했다. 릴라는 하루에 한 번씩, 한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라틴어 책을 가지고 저녁 시간 전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

릴라가 말했다.

릴라는 내가 낙제한 것을 이미 알고 나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했다.

 

211

리라는 자기 부모님과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았다. 파시즘에 대해서도 왕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권력남용이나 폭정, 착취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들은 분명 돈 아킬레를 증오하고 솔라라 집안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돈 아킬레 자식의 가게나 솔라라네 가게에서 자신들이 번 돈을 쓰고 때로는 우리를 그곳으로 심부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고는 솔라라네 가족이 원하는 것처럼 파시스트나 왕정복고주의자들에게 투표를 한다. 그들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과거일 뿐이니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 이전'에 대한 대화는 여름 내내 나눴던 다른 어떤 우울한 이야기들보다 내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294

니노는 릴라처럼 내면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이것은 축복이자 고통이었다. 이들은 만족하는 일이 없고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는 이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매 순간을 밝게 살았다. 

그날 밤 이후, 니노의 아버지는 가벼운 입맞춤만을 남겨 놓고 나를 어둠으로 밀쳐낸 그의 아들에 대한 믿음직스러운 대안이자 내 편지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릴라의 대안이 되었다. 나는 나중에야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릴라와 니노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친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언제나 명확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틀렸다면? 마르첼로를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도나토 아저씨를 그렇게 끔찍하게 여길 이유는 또 무엇인가.

 

330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린 시절 꿈꿔왔던 부의 의미가 다시 한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아씨들' 같은 책을 출판해 부와 명성을 얻고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금화로 가득 찬 보물 상자를 들고 행렬을 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성에 쌓아둘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따. 그렇지만 우리 존재를 확고하게 해주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소중한 사람들의 '경계의 해체'를 막아줄 시멘트 같은 돈의 이미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구체성과 일상적인 행동, 그리고 협상이었다.

사춘기 시절 부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세상에 둘도 없는 신발 같은 어린 시절의 공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귀족처럼 돈을 쓰고 싶어 하는 리노의 광폭한 욕구의 형태로 나타났다. 또 부는 화심을 얻으려고 텔레비전, 파스타, 반지를 사는 마르첼로에 의해서도 나타났고, 온간 종류의 햄을 팔고 빨간색 오픈카를 가지고 있으며 4만 5천 리라쯤이야 푼돈이라는 듯이 돈을 쓰고 릴라의 그림을 액자에 넣고 치즈 같은 식료품 말고도 신발을 팔기 위해 자재비와 인건비에 투자하고 자신이야말로 동네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도래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스테파노에 의해서도 체현되었다. 부라는 것은 생활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다. 거기에는 영광도 화려함도 없었다.

 

426

그들과의 잊리감 때문에 생긴 불행한 소외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낀 것은 오라치오 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던 바로 그 길에서였따. 나는 이 아이들과 함께 자랐고, 이들의 행동은 내게도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거친 언어는 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6년 동안 매일같이 이들이 전혀 모르는 길을 걸어왔다. 학생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훌륭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땐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제해야 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기껏해야 나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킬 필요가 있을 때만 그런 모습을 잠깐 내비칠 뿐이었다.

자동차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곳에는 내 친구들은 물론 내 남자친구도 있었다. 우린느 함께 릴라의 결혼 피로연에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피로연이야말로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전혀 다른 데도 내게 필요한 유일한 사람인 릴라가 이제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행사였다. 그녀가 없으면 나와 자동차로 이 길을 달리고 있는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같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나처럼 고향에서 벗어난 알폰소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니노에게 "나와 함께 있어줘. 함께 피로연에 가자. 내 기사가 실린 잡지는 언제 출판이 되는지 알려줘. 우리끼리 이야기하자. 파스콸레의 운전과 그의 천박함에서, 카르멜라와 엔초와 안토니오의 거친 말투에서 우리를 지켜줄 우리만의 은신처를 만들자"라고 말하지 못한 걸까. 

 

429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이미 공부를 계속한 마당에 이제 자신의 딸이 나와 함께 자란 다른 아이들보다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이 있는 곳은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금 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나를 거친 바다와 소용돌이와 절벽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자신 옆에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눈에는 안토니오가 모든 위험의 상징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세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머니와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어머니와 같아진다면 내 곁에 안토니오 말고 누가 남겠는가.

그러는 동안 신혼부구가 박수갈채를 받으며 등장했다. 밴드는 즉시 '결혼행진곡'을 연주했다. 나는 어머니와 한 몸인 양 어머니 곁에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이질감이 내 안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온 동네 사람의 축하를 받는 릴라의 모습은 행복해보였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우아하고 정중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린 시절 그녀의 걸음걸이를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모델로 삼았더랬지.

내가 틀렸다. 그녀는 그 찬란한 세계에 스스로 갇혀 그곳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취했다. 그녀가 취한 가장 좋은 것은 그녀 옆에 있는 청년과 이 결혼과 이 예식 그리고 오빠와 아버지를 위한 신발 놀이였다. 이 모든 것은 면학도로서 내가 걸어온 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나는 완전히 홀로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릴라마저도 내 어머니의 세계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해내야만 한다. 이제는 복종만 할 수는 없다. 언젠가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우리 집에 와서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을 내 부모님에게 강요했을 때처럼, 나도 어머니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전히 내 한쪽 팔을 붙잡고 있는 어머니를 무시해야 한다. 나는 이탈리라어, 라틴어, 그리스어에서 1등을 한 데다 종교학 선생님께 맞섰고, 내 이름이 적힌 기사가 잘생기고 영리한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의 글과 함께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435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모두들 술에 취해 들떠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파티 이면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신부측 지인들의 못마땅한 얼굴은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일 듯한 불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여자들의 분위기가 심각했다. 결혼선물과 걸치고 있는 옷가지를 사기 위해 주머니를 탈탈 터는 것도 모자라 빚가지 냈는데 걸인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에게 제공되는 포도주는 형편없었고 식사가 나오는 속도는 느려 터져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왜 릴라는 나서지 않는 걸까? 왜 스테파노에게 항의하지 않는 거지?

나는 이 여인들을 잘 알고 있다. 릴라를 아끼는 마음에 지금은 분노를 참고 있지만 피로연이 끝나고 릴라가 여행복으로 갈아입고 돌아와서 하객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준 다음 신랑과 우아한 모습으로 떠나가면, 전대미문의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이로써 수개월, 수년간 증오가 계속될 것이고 온갖 모욕과 욕설이 오갈 것이다. 그러다 이 다툼에 남편과 아들을 끌어들일 것이고 그러면 이들은 각자의 어머니와 눈이와 조모에게 사내로서의 역할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를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내 눈에는 자신들의 약혼녀에게 엉큼한 눈빛을 보내면서 은근히 유혹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악사들과 가수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험악한 시선이 보였다.

 

 

 

나폴리 4부작은 두여자의 우정과 사랑, 순응과 저항, 역경과 승리, 회한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누'와 '릴라'는 1944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남남인 여자와는 눈길도 마주쳐서는 안 되지만, 내 사람이 된 여자는 쥐고 패고 다 할 수 있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시대이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 여자의 행복은 남자로 결정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때이다. 그 이후로 2차세계 대전, 냉전, 산업 고도발전, 68 혁명의 봄, 민주화, 히피, 신세기, 뉴밀레니얼의 시기를 지난다.

 

이탈리아 나폴리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들을 가진 곳이다. 지중해의 햇살, 인심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베수비오 화산의 뒷마당이자, 마피아 카모라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쉽게 상상할 수 없겠지만, 제국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치열하게 죽고 죽이던 곳이기도 하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나폴리의 전후 역사와 아주 사소한 동네 사람들, 특히 두 소녀 이야기라는, 어마어마한 거대담론과 미시적 야사를 씨실과 날실처럼 꿰어 만든 태피스트리이다. 나폴리 4부작은 성장소설로 시작해서, 약자의 투쟁사, 그리고 대하소설로 이어지지만 결국에는 막장 아침드라마가 아니었나 싶은,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의 나폴리와 딱 어울리는 소설이다. 마치 아침드라마가 항상 마지막에 흥미진진하게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다음회에 계속'이라는 말로 사로잡듯이, 궁금증을 유발하는 장면으로 각 에피소드 끝을 장식하며 다음 장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급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줄거리에 책장이 쉴 틈 없이 넘어가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역할 없이 놓여 있지 않고 제자리에 꼭꼭 들어 앉아있다.

 

현실에 단편적인 인물이 없듯 이 소설도 입체적 인물들로 테트리스 쌓듯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자칫 인물 행동의 개연성이 떨어져 집중력을 잃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려드는 흡입력을 보이는 것은 작가의 치밀하고 세미한 심리 묘사 덕분일 것이다. 설득력 있게 흘러가는 심리 묘사에 빠져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물이 저지른 어리석은 또는 극악무도한 행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추리 하게 만들고, 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없지만 항상 누군가를 응원하게 만든다. 

 

소설은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다섯 시기로 흘러가지만, 분권은 4권이다. 각 권의 제목이 그 한권의 축약본이다. 때로는 대사로, 때로는 직접적인 상황으로 설명되는 제목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 의미를 알게 될 때, 탄성 또는 탄식이 나온다. 제1권의 제목은 '나의 눈부신 친구'이다. 1권의 주요 흐름은 '레누'가 '릴라'의 명석함과 영리함을 찬탄하는 묘사인데, 놀랍게도 '나의 눈부신 친구'는 '릴라'가 아닌 '레누였다.

 

레누와 릴라는 거의 모든 면에서 반대 성향을 보이는 친구이다. 레누는 신중하고 조심스럽지만, 릴라는 도전적이고 호전적이다. 레누는 항상 릴라의 당당함과 순발력을 선망하고, 동경하고, 추종한다. 릴라는 레누보다 명석하고 영리했지만 구두수선공이라는 집안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학업을 지속하지 못한다. 레누는 학년을 올라가며 온화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자란다. 릴라는 여자의 인생이라는 현실에 일찍 뛰어들어 지혜를 습득하고 발휘한다. 어린 나이에 일찍이 부자와 결혼하여 사모님의 길로 들어선 릴라와 꾸준하고 끈기있게 학업을 이어간 레누가 각자 맞는 환경의 변화 속에 최선을 다하여 인생을 꾸려나간다. 릴라가 레누처럼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더라면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인생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나쁠 때조차도 진정 나쁜 것은 아니다. '릴라'의 인생도 그렇고 '레누'의 인생도 그렇고 동네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인생은 주로 쓴맛 나는 진창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하루하루를 버티고 일년 이년을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기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인생은 그런대로 흘러가게 놔두면 그런대로 잘 흘러간다. 인생만사는 새옹지마다. 남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자리에서 한 순간에 비웃음 받는 자리로 떨어질 수도 있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가도 칭찬이 자자해지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결과적으로 레누가 만났던 남자들 -안토니오, 프랑코, 피에트로- 은 바른 남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