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나폴리 4부작 |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Storia del nuovo cognome

네다 2020. 12. 1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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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4부작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Storia del nuovo cognome,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 김지우

한길사

 

21

돈도 남성의 육체도 학업조차도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다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나았다. 가슴속에 릴라의 분노가 느껴졌다. 내 것이기도 하고 내 것이 아니기도 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통제력을 잃었고 그 상실감은 내게 오히려 기분 좋은 만족감을 주었다. 나는 그 힘이 확장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내가 평소에 불행을 조용히 감내라는 이유는 공격적인 반응을 나타낼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행동이 두려웠다. 그보다는 속으로 후회를 곱씹으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 편했다. 

 

36

나는 모든 것이 릴라 탓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하게 살기로 작정을 했으니 릴라도 잊어야 한다. 릴라는 항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원하는 바를 이뤘다. 나는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무색무취한 존재일 뿐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나면 나에 대한 안토니오의 애정과 그에 대한 내 애정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지.

 

330

나 자신도 되돌아봤다. 나는 잘못된 판단을 했고 착각에 빠졌다. 나같이 작고 통통하고 성실하기만 할 뿐 똑똑하지도 않은 데다 교양이 있는 척, 아는 것이 많은 척만 하는 안경잡이를 니노가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비록 짧은 여름휴가 동안이지만. 그러고 보니 니노가 나를 정말로 좋아해주기를 바라긴 한 걸까. 내 행동을 세밀히 되짚어 보았다.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정확히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애써 숨겨왔을 뿐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내 감정에 회의적이고 확신이 없었다.

왜 릴라에게 한 번도 니노에 대한 내 감정을 고백하지 못했을까. 지금도 그렇다. 한밤중에 나를 찾아와 털어놓은 릴라의 고백이 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고 왜 소리치지 못한 것일까. 왜 그녀에게 입 맞추기 전에 니노가 내게도 입 맞춘 적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대체 왜 항상 이 모양일까. 너무나 간절하게 부와 명예와 칭찬과 성공을 갈망하는 본심이 두려워서 오히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그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폭발하여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예를 들어 니노의 아름다운 입술을 죽은 쥐의 시체와 비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한걸음 다가가다가도 즉시 물러설 태세를 갖추는 것일까. 그렇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언제나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일까. 그래서 내게 고통을 주는 이들을 위한 합리적인 변명거리를 내가 먼저 나서서 제공해주는 것일까.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으며 눈물을 흘렸다. 날이 밝아올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니노는 진정 나디아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갈리아니 선생님께 나에 대한 칭찬을 듣고 몇 년간 나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과 호감 섞인 감정을 가지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이스키아에서 릴라를 만나자 그녀야말로 자신의 유일하고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 그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어떤 명분으로 그를 탓하겠는가. 니노와 릴라의 이야기에는 강렬하고 지고지순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숙명적인 이끌림이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혀보려고 시구절과 소설 구절을 생각해보았다. 이러려고 공부를 했나보다고 생각했다. 고작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써먹으려고.

릴라는 니노가 수년간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에 간직해온 불씨에 불을 붙인 것이다.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이상 이제 릴라가 니노를 사랑하지 않더라고 니노는 릴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릴라는 이미 결혼을 했기에 다가갈 수 없는 금단의 열매다. 결혼은 영원한 것이다. 죽음 뒤에도. 물론 그 관계를 깨뜨릴 수는 있겠지만 이는 심판의 날까지 지옥의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의미한다.

 

404

모든 것은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릴라는 그런 나와는 달리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할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은 망설임 없이 취할 줄 알았다. 열정을 다할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모멸감도 비웃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릴라에게 사랑은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릴라는 니노를 가질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생각에 잠겼다. 릴라가 옳았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눈속임일 뿐이다. 하늘은 두려움의 왕좌일 뿐이다. 지금 나는 바다에서 열 발짝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쉬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끔찍할 따름이다. 나는 이 해변과 바다, 온갖 형상의 짐승 무리와 함께 전 우주적 두려움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미세한 입자일 뿐이고, 이 미세한 입자를 통과하는 모든 것은 그제야 스스로의 두려움을 자각하게 된다.

 

562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런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런 인물들이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을 했는지도 몰랐으며 명망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도 알지 못했다. 예컨대 아무리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해도 어떤 교수님이 내게 갑자기 "내가 어떤 계보를 통해서 이 대학에서 이 과목을 가르치게 됐는지 학생은 알고 있나?"라고 묻는다면 나는 십중팔구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그 배경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들 사이에서 실수하거나 틀린 이야기를 할까 봐 두려워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나 가끔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프랑코의 명성에 기대어 말하는 법을 배웠다. 솔직히 나도 말은 꽤 잘했다. 적어도 실력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의 강함에 기대어 가끔은 그보다 더 대담한 태도를 취해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게 능력이 없을까봐, 말실수를 할까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아는 사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경험이 없는지 드러날까봐 불안했다.

 

563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 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576

하지만 내가 더 상처받았던 것은 자부심 뒤에 언제라도 상황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 성적이 나빠져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세상이 안정적인 곳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땀을 닦아주고 수도 없이 열을 재게 했다. 어머니는 당신 인생의 트로피 같은 내가 죽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진 걸까. 내가 기력이 빠져 학교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봐 두려운 걸까. 어머니는 광적으로 릴라의 이야기에 집착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릴라를 의식했는지 깨달았다. 내 어머니까지도 릴라가 나보다 뛰어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내가 앞섰다는 사실이 놀라서 아직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동네에서 가장 운 좋은 어머니 자리를 놓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저 전투적인 모습을 보라. 저 허영심 가득한 눈빛을 보라.

어머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면서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더 처절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652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둘은 순서도를 구성하는 연습을 한다. 세상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정리해버리고 일상의 모든 행위를 단 두개의 가치, 0과 1로 도식화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허름한 방 안에서 리누초를 깨우지 않기 위해 그 무미건조한 언어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 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