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나폴리 4부작 |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Storia della bambino perduta

네다 2020. 12. 1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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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4부작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Storia della bambina perduta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 김지우

한길사

 

238

내가 묻자 릴라는 헐떡이면서 자동차의 경계가 해체되었다고 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마르첼로도 경계가 해체되어 자동차와 마르첼로가 본래 틀과 몸에서 쏟아져 나와 그 금속성 액체와 살이 뒤섞여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 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나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릴라는 자기는 절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거칠고 고통스럽게 뒤틀린 사물의 본모습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했다. 릴라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잘 정돈됐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런 사물의 거짓된 모습을 사물의 본모습이 밀쳐내 버리면 자기는 혼란스럽고 끈적거리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정에 뚜렷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다. 촉각이 시각으로, 시각이 후각으로 녹아내린다고 했다.

"아! 세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지금 너도 봤잖아, 레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아무 것도 없어."

 

243

나는 여전히 릴라가 겁에 질려 쏟아낸 파도 같은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두려움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용암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지구 내부에서 흐르는 상상 속의 불타는 강물마저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모든 두려움은 내 머릿속에서 정돈된 문장과 조화로운 이미지로 정리되어 나폴리의 길처럼 까만 돌로 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한마디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든 책이든 프랑코든 피에트로든 아이들이든 니노든 지진이든 그 무엇이 내게 부딪혀 올지라도 결국 다 지나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나의 수많은 자아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연필심이 원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컴퍼스의 고정된 축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릴라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 그런 사실에 확신이 생겼고 뿌듯했다. 그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고 릴라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릴라는 도무지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릴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릴라는 분노하며 분개하면서 언제나 우리 위에 군림해왔고 모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해왔다. 그런 릴라가 정작 자신을 녹아내린 액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릴라가 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형태를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조종했는데도 액체가 범람하면 릴라는 스스로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럴 때면 혼돈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나 활발하고 용맹한 릴라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무無가 되고 말았다.

 

344

"상대방의 배신은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되지 않으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뭐든 다 용서하게 되거든. 배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어야만 해."

 

360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갑자기 나폴리, 특히 고향 동네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필수적인 내 삶의 중요한 일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기분 좋은 만족감으로 도약했다. 파국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일로 되레 문학적 수준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이는 내 글의 문화적·정치적 성향을 특징 짓는 결정적인 선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릴라도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릴라는 내 원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내 원고를 좋지 않게 평가해 내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게 되자 릴라는 그녀로서는 드물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릴라가 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릴라가 틀려서 기뻤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릴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나는 나고 릴라는 릴라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내게는 이제 리랄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권위가 생겼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 강해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출신의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출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출신에 어떠한 형태를 부여하고 나와 릴라를 비롯한 모두를 위해서 우리의 출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던 것이 이제는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해줄 바탕이 되었다. 

 

472

나폴리는 일찌감치 기술 발달과 과학과 경제 발전, 풍요로운 자연 환경,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념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따위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준 유럽의 대도시였다.

이런 나폴리에서 태어나서 좋은 점은 딱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주장하는 바를, 끝없는 진보의 꿈은 사실 잔인함과 죽음으로 점철된 악몽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거의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481

"내가 뒤에 숨어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허영심이 많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어."

"나도 허영심이 많다는 거야?"

"비교해보면 그래. 네 친구 리나는 그렇지 않거든. 하지만 네 친구가 안됐어. 허영심도 자원이거든. 허영심이 많으면 네 자신과 네가 가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리나에게는 허영심이 없어. 그래서 딸을 잃은거야."

 

550

'매일 아버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었네. 이마도 피에트로를 정말 좋아하고. 남자들은 다 똑같은가봐. 잠깐 같이 살다 아이를 낳으면 떠나보내야 하나봐. 니노처럼 경솔한 사람이면 아무런 책임감 없이 떠나는 거고 피에트로처럼 진지한 사람이면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필요할 때 최선을 다하는 거야.'

확실한 것은 정절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동거의 시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리노라 불리는 불쌍한 젠나로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걸까. 데데는 자신의 열정을 다 불태워버리고 난 다음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그러다 가끔 서로 만나기도 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604

"임미까지 나를 떠나면 내 인생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

릴라가 미소를 지어보았다.

"인생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어디에 쓰여 있는데?"

 

633

그 인형은 어린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릴라가 제 손으로 창고속에 내던진 바로 그 인형이었다. 내가 그 일을 두고 생각에 잠긴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우물 앞에서 나는 끝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 속에는 수많은 덫이 있고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덫을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