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원더보이

네다 2020. 12. 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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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문학동네

 

170

누군가 1974년 11월 4일 오후 두시에 만나자고 하면, 그 사람과 사레들린 할머니가 검은 곰에게 화를 내며 눕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식이지. 그 사람은 텔레비전에 나가서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천자리까지 외웠어. 그가 머릿속으로 외운 원주율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주율일 거야.

 

되새 그림자 흐리마리 가려진 마당의 종려나무,

밤의 목소리에 드리워진 마음이여!

오래전 숲길을 지날 때, 누군가 들려준 우울한 휘파람에

발간 눈두덩 비비며 한때 뜨거웠던 여름을 떠올렸다네.

 

느릿느릿 시냇물로 재잘대며 모여드는 청둥오리들과

눈동자 어슴푸레 올려다보는 황조롱이들과 검푸른 주목의 시간.

깊은 밤의 짙은 둘레를 지나 조는 듯 새초롬하게 밀려드는

구름의 첫마디, "무던하지 않은 눈동자는 차갑게 젖어드나니..."

소용없는 후회라고, 지나간 희망의 흔적이라고.

 

마음의 지도에 난분분하게 떨어지던 차디찬 숨결.

여름의 공원 벤치에서 혼자 취해 부르던 노래.

"어제는 비가 내렸고, 찾아온 여인과 저녁 전에 이별했다네."

 

밤이 늦도록 입맞추던 추억을 돌이키다가 흙손으로 

얼버무린 너의 미간眉間, 또다시 하얗게 내려앉는

강직한 가을 서리, 첫눈의 부지런과 새해의 정직

 

어절마다 맨 앞의 자음이 숫자를 뜻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외면 소수점 아래 백자리까지는 외는 셈이었어. 그러니까 천자리까지 외는 데에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어.

 

199

그 문제엑 대해서 억지로 뭔가 말해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인생이란 한강과 같은 것이라고. 해가 지는 쪽을 향해 그 너른 강물이 흘러가듯이, 인생 역시 언젠가는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든다. 거기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넘으리라. 그 경계선 너머의 일들에 대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그게 눈을 뜨고 꾸는 꿈속의 일, 그러니까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내가 본 그 수많은 눈송이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고,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 빛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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