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조선일보Books] 미래를 말하다

네다 2008. 6. 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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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Books | 김기천 논설위원 kckim@chosun.com
범죄·폭동·히피문화가 민주당 때문이라고?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예상한 외 옮김 현대경제연구원북스|360쪽|1만8000원

 

미국 버클리대의 경제사학자인 브래드퍼드 드롱 교수가 10여 년 전 미국의 억만장자 숫자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는 연간 소득이 평균적인 노동자 2만 명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을 '억만장자'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억만장자는 1900년 22명에서 1925년 32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1957년에는 16명으로, 1968년에는 다시 13명으로 더 줄었다. 요즘엔 그 숫자가 160명 정도로 크게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950~60년대 미국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국의 양극화는 노조를 탄압하고 보지제도를 약화시키고 부유층을 위한 감세 정책을 편 공화당 정권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자료를 보자. 1969년에 미국 최대 민간기업이었던 GM의 찰스 존슨 회장은 연봉으로 79만5000달러를 받았다. 그 당시 GM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 9000달러보다 90배 가까이 많은 거액이었다. 그래서 존슨 회장의 연봉에 대한 시비가 일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소득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4만 달러가 넘어 중산층 삶을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요즘 미국 최대 기업인 월마트의 리 스콧 회장은 2005년에 2300만 달러 가까운 연봉을 챙겼다. 월마트 비(非)관리직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1만8000달러 정도였다. 회장과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1200배 넘게 벌어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월마트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36년 전 GM 노동자들의 절반도 안 된다는 점이다.

 

결국 1950~60년대의 미국은 오늘날보다 소득 분배의 불균형이 훨씬 덜했고, 억만장자도 유난히 적었다는 것이다. 다른 통계자료들도 당시 미국이 이례적일 정도로 중산층 중심의 평등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1950~60년대를 경제적 불평등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로 '대압축(great compression)의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미국은 어떻게 해서 평등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고, 지금은 왜 그렇지 못한가.

폴 크루그먼(Krugman)의 《미래를 말하다》는 그 해답을 경제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동인(動因)에서 찾고 있다. 제도와 규범, 정치적 환경이 소득 격차를 줄이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에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국민 대다수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의 성과라고 했다. 부유층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그 돈으로 사회안전망을 확충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정부의 노동권 보호 정책으로 노조가 활성화되고, 전쟁 기간 중 임금을 통제한 것도 소득 격차를 줄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경제 발전으로 중산층 사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게 아니라 평등사회로 가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정치적 행동을 통해 중산층 사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반대로 1980년대부터 중산층 사회가 해체되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것은 '꼴통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공화당 정권이 노조를 탄압하고, 복지제도를 약화시키고,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양극화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기술 발전과 세계화의 영향은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에게 인기가 없을 정책을 펴면서도 공화당이 계속 선거에서 승리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크루그먼은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1960~70년대에 미국 사회의 주요 이슈였던 범죄율 증가와 도시 폭동 사태, 히피문화 등을 두루 살피며 그것이 과연 민주당과 진보주의가 책임졌어야 할 문제인지를 따진다. 1955년 〈내셔널 리뷰〉 창간과 함께 시작된 '보수주의 운동'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공화당을 장악하고 결국 3정권을 잡게 됐는지도 추적한다.

 

크루그먼이 찾은 해답은 '인종 문제'다. 보수세력들이 남부 백인들의 머리 속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인종차별주의, 백인 우월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해 공화당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미래를 말하다》는 경제적 불평등, 양극화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크루그먼도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진보주의 운동의 투사, 더 심하게 말하면 정치적 선동가의 모습에 가깝다.

 

'보수주의 운동은 애초부터 반(反)민주적이고 권의주의적' '무모하고 심술궂은 공화당원' '죄 없는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을 가하는 부시 행정부' 같은 독설을 거침없이 퍼붓고 있다. '정치적으로 불평등을 줄이고 미국을 중산층 국가로 다시 만들기 위해 지금 바로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며 선동하고 있다. 민주당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진보주의 운동이 시작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속이 후련해진다고 생각할 독자도 있고, 눈살을 찌푸릴 독자도 있을 것이다. 노조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프랑스 복지모델의 부작용에는 눈을 감은 채 소득 불평등 개선효과만을 거론하는 등 일방적인 주장도 적지 않다. 저자 스스로 '진보주의를 실천하려면 당파성을 띠여야 한다'고 한 사실을 유념하고 봐야 할 듯하다. 경제학자인 크루그먼은 프린스턴대 교수이자 뉴욕타임스의 고정 칼럼니스트이다.

 

원제 The Conscience of a Libe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