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친밀함의 폭력성

네다 2014. 3. 28.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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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재영 이성민 주연의 영화 '방황하는 칼날'이 개봉한다. 우연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똑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성폭행 당한 딸의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해자 남학생을 직접 죽인다. 우리나라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권한을 무시한 것이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2.

더구나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실제로 죽은 남학생이 실제로 성폭행을 범행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한 게시판 글에 따르면 두 남여학생은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는데, 여학생이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하기가 두려워 거짓으로 성폭행 당했다고 이른 것이 이런 사태를 가져왔다는 말도 있다. 아버지 성격이 불같은 것이며, 애초에 칼을 들고 나갔던 것이며, 여학생과 남학생이 관계 후에도 수차례 연락을 주고 받았다는 정황이 있다. 아버지가 좀더 신중하게 사실관계를 알아봤어야 했다는 것이다. 혹시, 아버지는 이 영화의 존재를 알았을까. 혹시 이 영화의 내용을 알았을까. 영화를 알고난 후, 딸에게 성폭행 언질을 들었을까. 

 

3.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라는 말이 있다. '내 자식'은 마냥 착하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아이인데, 못된 친구의 꾐에 빠져, 어쩌다가 한번 실수로, 정작 내 자식도 피해자가 된 채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해자인 '내 자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피해의 원인요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부모는 '내 자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못된 친구를 사귄 것도 실수일까. '내 자식'은 정말 범죄가 범죄인줄 몰라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부모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자식을 잘아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한다. 확신이 깨지는 순간 자기자신의 존재가 부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낳고 평생 키운 나의 증거가, 내가 모르는 다른 생명체가 되어있다는 사실.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한발자국만 떨어져서 '내 자식'을 바라보면, 추락하는 기분을 조금 덜 느낄수도 있을텐데. 어떤 존재에 대해 가장 친밀하다고 느끼는 순간, 외부영역에 대한 폭력성은 극도로 높아진다.

 

3-1.

부모가 자식에 대해 더 많이 알까, 자식이 부모에 대해 더 많이 알까. 아마 자식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위로는 속일 수 있어도 아래로는 속일 수 없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자식은 부모에게 '척'할수 있지만, 부모는 그렇게 못한다. 행복한 척 하고 있으면 부모는 정말 행복한 줄 알겠지만, 자식은 금방 알아챌 것이다.

 

4.

예전에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 게시판에 "'성폭행 피해자녀가 가해자남을 불에 태워 죽였다'는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댓글" 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온 적이 있다. 유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댓글은 '그러게 누가 그렇게 불에 잘 타는 옷을 입고 다니래?' '남자라면 신체구조상 불이 났을때 코를 막고 숙이고 구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춥다고 불피워 달라고 징징댔겠지' 등 이었다. 성폭행 피해를 당하면 피해자를 욕하는 목소리가 가해자에게 적용되었을때 어떻게 말이 안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리라. 왜 다른 범죄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유독 성폭행의 경우에 피해자 책임을 운운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일까. 여성의 체면과 내숭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정도와 성폭행시 피해자 책임을 논하는 정도가 관련 있을까. 명확하고 정직한 의사표현이 성폭행시 피해자 책임에 대한 논쟁을 줄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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