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단 하나의 문장

네다 2019. 1. 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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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54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고작 이 정도의 의견 불일치로 이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엔, 결혼이 이튿날 리본과 풍선의 잔해를 청소할 일만 남아 허무해지는 아이들 파티가 아닌 칼날 같은 계약과 무거운 책임이라는 점과, 갈라섰을 때 양쪽의 리스크 또한 크다는 점을 어필할 예정이었다. 길어야 사 년만 참으면 된다고, 그때 가서 함께 생활하지 못했던 딸아이와의 서먹함은 부부가 공동으로 감당할 몫이라고 정주는 말해줄 참이었다. 그 어떤 불편도 부작용도, 정주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다, 다시 스쳐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97 지속되는 호의
바쁜 맞벌이 부부들이 보상심리로 일정한 치환을 기대하며 종종 저지르곤 하는 패착대로, 금전적 투자로써 어느 정도의 해결이 가능한 유기농 식음료나 북유럽산 원목 교구 따위나 검색할 게 아니라, 서영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지도 버리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경력을 쌓아나가다 내면의 고갈을 견디지 못하고 성채의 건설을 포기하는 동안 아이의 교우관계 구축과 성장에 필요한 최적의 시간을 놓쳐버렸다. 이제 상휘는 고만고만한 경제력과 지적 수준을 지닌 학급 아이들 틈에서 자신만의 템포로 천천히 자라야 할 터였다. 


102

나는 한 개 한 개의 송곳이 유난히 튀어나오기보다, 그걸 감싼 가죽이 튼튼하길 바랍니다. 한 개의 송곡이 뾰족 뚫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질기고 억센 가죽 주머니를 원해. 사람이 위대하지 않고서도, 사랑이 위험하지 않고서도 그 꼴이 유지되거나 이루어지는 자리를 바라요. 그 누구도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복면을 쓰거나 전신 타이츠를 입지 않더라도


현실에서, 미래에서, 심지어 가상환경에서 느껴지는 

인간 존재의 하찮음, 작은 외로움, 그보다 더 작은 깨달음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짜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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