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제0호Numero Zero

네다 2019. 1. 1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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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Numero Zero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 이세욱

열린책들


22

문제는 필요할 때 좋은 생각을 미처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든 시험을 마치고 학위 논문을 내게 되리라고 확신하며 계속 살아간다. 그러다가 실현할 수 없는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가는 신세가 되면, 이미 패배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냥 되는대로 살아간다.


151

어떤 글을 읽었는데, 자폐증의 초기 증상에 관한 실험을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 나와 자네가 피에리노라는 아이와 한방에 있다고 하세. 피에리노는 자폐증에 걸린 소년이야. 자네는 나한테 이렇게 말해. 작은 공 하날르 어딘가에 감춰 놓고 방에서 나가라고. 나는 공을 꽃병 속에 숨겨 놓네. 내가 밖으로 나가면, 자네는 꽃병에서 공을 꺼내어 서랍에 넣어. 그러고 나서 피에리노를 보며 이렇게 물어. <브라가도초 아저씨가 돌아오면, 그이는 어디에서 공을 찾아낼까?> 그러면 피에리노는 대답하지. <서랍에서 찾아내지 않을까요?>라고. 공을 숨겨놓고 나간 나는 공이 꽃병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피에리노는 그 생각을 못 한다는 걸세. 소년의 머릿속에서 공이 이미 서랍 속에 있거든. 피에리노는 남의 입장에 설 줄을 몰라.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193

어떤 사람에 관한 신문 기사들의 스크랩이 있다고 칩시다. 한 기사는 그 사람이 몇 해 전에 과속을 해서 벌금을 물었다고 알려 줍니다. 두 번째 기사는 그 사람이 지난달에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방문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기사는 그 사람을 전날에 디스코텍에서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전해 줍니다. 이런 정보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은 그를 교통 법규를 위반하면서 술을 마시는 곳으로 달려가는 무모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암시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마도 - 저는 분명히 <아마도>라고 했지만, 이건 사실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 그는 소년들을 좋아한다고 넌지시 말할 수 있죠.


218

예를 들어 열 살짜리 소년이 강한 산성 물질을 저장하는 탱크에 던져져서 살해되었다고 하면, 텔레비전은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서 <아주머님, 아드님이 사망했다는 것을 아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하고 묻습니다. 사람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힙니다. 모두가 그 인터뷰에 만족하죠. 독일어에 그런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좋은 단어가 하나 있어요. <샤덴프로이데>, 즉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죠.


246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에게는 <파쇼 리토뢰오>라는 표장이 있다. 이 표장은 원래 에트루리아에서 유래하여 고대 로마 때에 사용되던 권표이다. 고대 로마에는 릭토르라 불리던 관리가 있었다. 최고 행정관의 부관 격이었던 릭토르는 회초리 다발과 도끼를 가죽띠로 함께 묶어 놓은 <파스케스fasces>라는 표장을 들고 다녔다. 권력과 단결력을 상징하는 이 표장은 로마 제국 말기부터 많은 정권의 휘장으로 사용되었고, 20세기에 와서는 <파쇼리토리오(릭토르의 다발)>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상징이 되었다. 파쇼, 파시즘 같은 말들은 바로 묶음을 뜻하는 이 라틴어 <파스케스>에서 나온 것이다.


314

우리가 찾고 있는 나라는 비밀이 없는 나라, 모든 일이 모두가 다 알도록 뚜렷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야. 중남미 어딘가에 그런 데가 있을 거야. 감출 게 없는 곳이야. 사람들은 다 알아. 누가 어느 마약 카르텔에 속해 있는지. 누가 혁명 게릴라들을 이끄는지 다 알지. 레스토랑에 가서 앉아 있으면, 친구들 한 패거리가 지나가. 그들은 무기 밀수의 대장이라면서 어떤 사람을 당신한테 소개해., 아주 잘생긴 남자야.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향수도 뿌렸어. 풀기가 빳빳한 흰 셔츠를 입었는데, 그 셔츨르 바지 위로 내리고 있어. 종업원들이 몸을 숙여 인사하면서 <세뇨르, 이쪽으로 오시죠>를 연발해. 그때 경찰 지휘관이 그에게 경의를 표해. 그야말로 비밀이 없는 나라야. 모든 일이 모두가 다 알도록 뚜렷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경찰은 법률에 따라 부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정부와 악의 세계는헌법의 규정에 따라 공존하고 있으며, 은행은 더러운 돈을 세탁하면서 살아가고, 수상하지 않은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제 허가증을 빼앗기는 불행에 빠져. 그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쏴. 하지만 자기들끼리만 그럴 뿐, 관광객들은 조용히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318

마이아는 나에게 다시 마음의 평화를 주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 되살려 주었다. 적어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고요하게 불신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분명하다. 삶은 견딜 만하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 된다. 스칼렛 오하라가 말한 대로 - 남의 말을 인용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나도 알지만, 나는 1인칭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제 남들이 말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자 한다 -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 산 줄리오섬은 햇살에 다시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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