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사소한 부탁

네다 2019. 1. 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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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부탁

황현산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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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는 인류가 진보한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자기처럼 좋은 혈통을 물려받지 못한 평민이 역사적으로 자의식을 갖게 되고, 거지의 행렬이나 다름없는 유랑자의 무리가 사라졌으며, 귀족 영주들의 땅따먹기일 뿐이었던 전쟁이 없어진 것 따위가 진보라면 진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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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와 예술가들, 좁게 말해서 시인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보들레르의 열정을 이어받은 현대의 시인들은 '무덤 뒤의 찬란함'에 자주 도취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빛을 일상적 실천의 등대로 삼는다. 언제나 물질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그 찬란한 빛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다른 세계의 빛이 이 세계의 실천을 지시한다. 저 불행한 청년은 이 실천이 두렵고 세상의 온갖 장애가 두려워, 이 세상을 파괴하고 저를 파괴하였으며, 마침내 저 찬란한 빛을 꺼버림으로써 자신이 가고 싶어했던 죽음 뒤의 세계마저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가 어떤 글을 써서 어떻게 자신을 과시하건 그는 패배한 사람일 뿐이다. 


50

운송중 부패 운운하는 식의 설명에 내가 늘 흥분하는 것은 거기서 천박한 과학주의나 일종의 식민지주의 같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식민지주의라는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저 불행한 대에 일본인들이 우리의 김치나 온돌을 헐뜯을 때 들이대던 논리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섣부른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나 설명 방식에는 이해가 쉽지 않은 것들을 가난이나 몽매함의 탓으로 돌려 농어촌을 도시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음모가 종종 숨어 있다. 그 음모 속에서 삶의 깊은 속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의 천박한 시선 아래 단일한 평면이 되어버린다. 나름대로 삶의 중심이었던 자리들이 도시의 변두리로 전락하는 것은 그다음 수순이다. 식민주의의 권력자들은 삶을 통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물론 이 일은 도시 안에서도 일어나고 한 사람의 도시민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모더니즘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염두에 두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근대주의는 한 시대의 과학으로(도는 그 과학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접한 지식으로) 미래의 지혜만이 해명할 수 있는 것들을, 또는 미래의 지혜 그 자체를 억압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홍어회는 부패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발효의 효과를 이용하여 조리된 음식이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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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유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어와 다른 외래어는 우리말 속에서 갖는 언어학적 가치가 다르다. '시인'의 '시'는 시정, 시집, 시심, 시문학, 서정시, 서사시와 연결되고, '시작'의 '시'는 시동, 시말, 시원, 시조, 시종, 시초, 개시와 연결되어 그물망을 형성하지만,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시'는 우리말에서 무엇인가. '능기'나 '기표'와 달리 '시니피앙'은 우리말 속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고립된 말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한 언어 체계 전체에 깊이를 만들지 못한다. 그물망과 연결 고리를 갖는 낱말은 그 자체를 설명하는 힘드 그 그물망에서 얻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그물망을 풍요롭게도 한다. 한 낱말은 항상 다른 낱말에 의지하여 그 뜻을 드러낸다. (순우리말 학술 용어 다듬기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한자어만큼 강한 그물망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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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들을 비교할 때 그들이 어떻게 여자들을 삶에서 소외시켜 종속적 존재로 만들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미조지니'라는 말은 저 작가들이 여자를 현실에서 소외시킨 모든 태도와 방법과 의식을 함축하게 된다. 그 의미의 폭이 이렇게 확대된다.

이 낱말은 이제 '여성혐오'라는 본디의 뜻보다도, 여자를 남성 입문의 발판으로, 구원의 여인상으로, 다른 세계의 안내자로 특화하여 살멩서 배제시키려는 모든 환상과 편견을 더 많이 의미하게 되지만, 그 말을 어느 시점에 한 번 번역한 말인 '여성혐오'는 내내 그 말 그대로 남는다. 모든 낱말은 그 말로 이루어진 사유와 함께, 그 말로 매개되는 삶과 함께 그 의미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지만 그 번역어도 반드시 그 본래의 말과 같은 방향으로변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불일치는 단순한 번역 일화로 그치지 않고 자주 사회적 오해로 발전한다.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이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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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교실의 수업처럼 제도의 뒷배가 없는 교육일수록 그 식민화의 욕구가 더 커질 수 있고, 그 지배 방식이 폭력적일수록 학생에게 미치는 선생의 영향력이 깊어진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지배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그 관계가 민주적일 때만 교육의 내용도 민주적 가치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