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Cosmetique de l'ennemi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 / 성귀수
문학세계사
45
"무엇보다도 장세니즘이 마음에 들어요. 그처럼 부당한 교리일수록 구미가 당기거든요. 그야말로 진지한 잔인성을 가능케 하는 이론이지요. 사랑처럼 말입니다."
62
"강간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꺼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말이오."
"법이라. 보아 하니 입만 열면 법 얘기인데, 당신이 그 짓을 하는 동안 그 불행한 여인이야말로 머리 속에 법을 떠올렸으리라는 생각은 안합니까? 아무래도 당신이 직접 강간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려."
"나도 무척이나 바라던 바요. 한데, 아쉽게도 내게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군요."
"그야 물론 그렇겠지."
"내가 그 정도로 못생겼나요?"
"문제는 그런 게 아니오."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당신은 당신 자신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있소? 그럴 때마다 당신은 폭력 이외의 다른 방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소. 난생 처음 마음에 들었다는 여자를 당신은 강간했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도, 지금 나한테 하듯이, 상대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식이오. 결국, 조금 덜 악취 나는 방식이긴 하지만, 나한테도 당신은 강간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도대체 누군가와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를 가져볼 생각을 해본 적은 있나요?"
"없습니다."
"으흠!"
"타인의 동의가 내게 무엇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지요."
"부탁인데,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시죠."
"먼저 한번 시도해보시오. 그러면 자연 알게 되리다."
"너무 늦었어요. 내 나이 마흔입니다. 우정에서나 사랑에서나 나는 누구의 마음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그 누구한테도 동료의식이라든지, 아니면 희미한 공감대조차 불어넣어 줘본 적이 없단 말이오."
"노력을 해보세요. 자신을 가꾸고 추스르란 말이오."
"내가 왜 노력을 해야 하죠? 난 그냥 이대로 만족하는데. 나는 강간이 좋소. 당신으로 하여금 강제로 내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게 즐겁단 말입니다. 노력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운명이 불만족스러워야 하는 것 아니겠소?"
114
"이런 무식한 사람 같으니, 화장법이란 보편적 질서의 학문이자 이 세상을 결정하는 지고의 도덕률이라오, 이처럼 기막힌 용어를 미용사들이 들먹거린다 해서 내 잘못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당신한테 덥석 달려들어 모든 걸 까발렸다면 그건 화장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을 겁니다. 애당초 당신이 타깃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신성한 현기증 속에서 실감해야만 했으니까요."
짜증에서 의문으로, 그리고 두려움으로, 그리고 분노로, 그리고 역겨움으로, 그리고 충격으로 이어지는 단말마의 거대 서사극.
제목을 '적의 화술'로 지었어야 하는것 아닌가 생각들었지만, 이내 '적의 화장법'이 맞겠구나 하고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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