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사랑이 한 일

네다 2021. 1. 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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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한 일

이승우

문학동네

 

52 소돔의 하룻밤

그 성 사람들이 소돔만큼 악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롯의 개입으로 멸망의 순간에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롯의 구원만큼 획기적이고 그보다 극적이다. 물론 롯이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 성을 구한 것은 아니다. 그가 그 성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 구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예측할 수 없고 대비할 수 없는 우연한 변수에 의해 일어난다. 롯이 신의 계획을 바꾸게 했다.

 

53 소돔의 하룻밤

이웃 성의 파멸과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도하는이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저 운 나쁜 자들의 우연한 재앙에 자기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만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우쭐했을 것이다. 그들이 소돔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든 나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파괴되지 않은 성이 파괴된 성보다 더 정의로웠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보다 더 착할 거라고 판단할 수 없다.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죽은 사람보다 살 가치가 더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104 사랑이 한 일

바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의 표현이에요. 그것이 왜 힘들지 않겠어요? 바치는 것이 힘들다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힘들지요. 이중으로 힘들지요. 자기에게 속해 있으나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라는 요구를, 자기에게 속해 있으나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 하는 것이니까요. 바치라고 요구하는 신은 실은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자 하는 분이 아니겠어요? 아니 바치라고 요구하면서 신은 이미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107 사랑이 한 일

그것은 사랑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맞아요. 사랑만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요구받을 수 있지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조금 덜 사랑했어야 했어요. 아버지의 신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거나 조금만 사랑했어야 했어요. 그랬더라면 그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일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에요. 그렇지만 사랑하지 않거나 조금만 사랑하기가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사랑은 참으로 무서운 거예요.

 

136

탐식가의 특징은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어도 먹는다는 것이다. 거의 항상 배가 고프지만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도 거의 항상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탐식가와 타인을 구별하는 요소이다. 위장의 요구는 절실해서 좀처럼 피하지 어렵지만 위장을 향한 요구 또한 만만치 않다. 아니, 후자의 요구가 더 압도적이다. 위장이 요구해서 먹기도 하지만 위장을 재촉해서 먹기도 한다는 뜻이다. 위장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도 음식 공급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것은 위장의 필요와 무관하다. 음식물로 위장이 가득차 있는데도 허전하고 공허하다면 이것은 누구의, 무엇의 필요인가. 위장에 빈 공간이 없는데로 여전히 음식을 갈구한다면 이 갈구는 어떤 공간을 채우기 위한 갈구인가. 위장은 꽉 찼는데 어디가 비어 있어서 어디를 채우려고 음식을 탐하는가. 탐식하는 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가 비어 있는지 안다면 그곳을 채울 것이다. 그러나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음식을 찾고 부르고 음식에 손을 대고 이미 꽉 차 있는 위장 속으로 집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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