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Books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움베르토 에코, "인터넷은 아주 멍청한 신(神)"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움베르토 에코 소설|이세욱 옮김|열린책들
732쪽|상·하권 각 1만800원
"이 세상은 한 권의 아름다운 책으로 귀속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말했다.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은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에 담긴 사랑과 지혜가 한자리에 모여 화학적 융합을 일으킨 종이 덩어리를 뜻한다. 사람들은 각자 읽은 책들 중에서 기억한 문장들로 개별 존재를 구축하면서 한 권의 책이 될 분량의 이야기가 담긴 인생을 남긴 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가 낳은 불세출의 기호학자·언어학자·소설가 움베르토 에코(76)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한 질의 백과사전으로 남을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정보 위에서 살아왔다. "에코의 서재에는 과연 어떤 책들이 꽂혀있을까." 독자들의 호기심은 당연하다. 에코가 2004년 발표한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그 궁금증을 밝힐 불꽃과도 같은 작품이다. 밀라노의 저명한 고서적 전문가 잠바티스타 보도니(애칭 얌보)가 작품 주인공이다. 그는 1991년 심장혈관계통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지만 역행성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환갑을 코 앞에 둔 나이에 그는 방대한 독서량을 통해 획득한 지식과 정보는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정작 자기 이름을 비롯해 모든 과거를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아내와 두 딸, 손주, 친구 등이 모두 생전 처음 보는 타인들이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와 '과거의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삽화적 기억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지금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사람을 가리킬 뿐, 과거에 우리가 나라고 느꼈던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과거의 나는 그저 안개 속으로 실종되는 겁니다."
과거를 망각한 그의 입에서는 과거에 읽은 모든 책의 문장들이 튀어나와 사소한 일상의 감정조차 인용법으로 표현한다. 가령, 그는 약간 긁힌 상처의 피를 맛보면서 "나는 종종 삶의 괴로움과 마주쳤네"라는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시 첫 행을 읊거나, 침대에 누워 "나는 오랫동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중얼거리는 식이다. 그의 의식과 존재는 그가 읽은 과거 문장들의 '혼성모방'(pastiche)이다. "내 머릿속은 비어 있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닌 기억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을 되찾기 위해 고향집에 내려가 헌책방 주인이었던 할아버지가 남겼고, 어린 시절의 그가 수집했던 1940~50년대 책, 신문, 잡지, 만화 등등을 다시 뒤적이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간다.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를 맛보다가 개인의 내면 속으로 추억여행을 떠나지만, 에코는 이 소설에서 그 또래의 이탈리아인들이 공유했던 활자의 제국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형성한 한 시대의 기호체계를 탐구한다.
이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로아나 여왕은 에코와 나이가 비슷한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탐독했던 SF 만화의 등장인물이고, 그 남자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의 모델이다. 이 소설은 과거의 종이 뭉치들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신비한 불꽃을 따라가는 정체성 찾기의 로망과 함께 에코가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옛날 이미지 자료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시대의 풍속화를 자세히 뜯어보게 한다.
거대한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뽑아들 듯이 진행되는 이 소설은 지식 항해가 무한대로 가능한 인터넷 시대의 정보 짜깁기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에코는 이 책 출간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인터넷 문명에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만약 우리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존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상호작용을 위한 보편적 기반을 마련해줄 겁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만 정보를 접하게 된다면 우리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고립된 나만의 백과사전을 만드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에코는 인터넷이 '지식 과다 상태'에 있기 때문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라고 에코는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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