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이웃돕기 일일찻집에 점심시간에 갔더니 연예병사들 양동근, 김정훈, 김재덕이 왔다.
원래 오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근지단장님이 명령해서 억지로 왔다.
억지로 왔더니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음식도 먹는둥 마는둥 두리번두리번 겁에 질린 고양이 새끼들 같았다.
우리는 그들을 환호성으로 반기는 소녀떼들도 아니었고, 괴성으로 '사랑한다'고 외치는 어린애들도 아니었고,
그저 재미없고 김빠지고 무뚝뚝한 표정의 그들을 동물원의 신기한 동물 정도로 생각하는 직장인들이었다.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처음 맞아봤을 것이다.
눈부신 조명과 항상 자기를 기다려준 팬들, 쉴새 없이 돌아가는 ENG 카메라와 후레쉬 세례,
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하고 힙한 여자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클럽이 그들의 세계일 것이었다.
군대라는 대한민국 청춘 사내들의 지옥에 오기 전까지는.
그들이 오늘 온곳은 그들을 동경이 아니라, 구경하고
더 멋있게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남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추레한 모습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질 화소의 카메라폰으로 찍어대고
시골 촌구석 다방같이 생긴 곳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둘러앉아 떡볶이와 김밥, 순대를 먹고 있는 곳이었다.
근지단장님이 노래를 시켰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터라, 더더군다나 셋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음악이 너무나도 다른 터라
부르지도 못하고 안 부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있었다.
뒤돌아서서 두런두런 뭔가 얘기하는 듯 하더니 양동근씨가 돌아서 얘기했다.
"제 노래들이 이런 곳에 어울리는 곡들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잘 모르기도 하겠지만, 그나마 알려진 곡 '웃어요'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웃어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종종 손발이 오그라들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그런 감정은 없어지고 어느새 그냥 공연장에 와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웃어요'가 끝나고 박수로 마무리하려는데 근지단장님이 앵콜을 청하셔서, 또 어쩔 수 없이 노래를 고민했다.
그들은 '이등병의 편지'를 선택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직업 국방인들은 아무도 그 노래를 몰랐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 양동근씨가 '이제다시' '시작이다' 일일이 가사를 알려주자 우리는 또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이등병의 편지'가 끝나자 근지단장님이 선곡하셨다. 그들은 코러스를 넣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흥겨운 노래라서 잘 끝났다.
근지단장님이 '여행을 떠나요' 한곡을 더 뽑으셨다.
나는 공연이 다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나왔다.
처음 그들이 우물쭈물할 때 우리는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으나
그들이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 즐거웠고 그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누구나 민망하고 무안하고 창피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인생의 치욕이라 부를만한 순간들이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의 앞에서 시험당하는 순간.
나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을 넘어 자존심의 존재조차 무시당하는 순간.
내가 누군지 어떤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 나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
이런 순간들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순간들.
그냥 잠자코 있으면 된다. 참는 것도, 이기는 것도, 버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으면 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즐기면 된다. 상처받으면 받는대로 깎이면 깎이는대로 그냥 그렇게 있으면 된다.
이겨낸다고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대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물론 연예인들을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역시 연예인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곧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점점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무명시절 이보다 더한 순간들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입대하기 전까지 그들은 최고의 인기쟁이들이었다.
그들은 오늘 이런 상황을 통해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토크쇼나 버라이어티쇼에서 흥을 돋구기 위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런 것도 다 추억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양동근'의 팬이 되었다.
허섭쓰레기 같은 공연장에 오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잊어버리지 않고 목에 두른 수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노력, 자신감, 책임감.
쉽게 상황을 즐길 수 있는 낙천성, 리더십, 카리스마.
관객과 대화를 하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유머러스함.
상황의 흘러감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혼자만의 리듬감.
만약 내가 무한도전이나 1박2일, 패밀리가 떴다의 PD라면 그를 꼭 영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