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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31222 이탈리아 로마 - 남부환상투어 폼페이

네다 2014. 1. 17.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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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맑음
이탈리아 폼페이
자전거나라 남부환상투어

 

폼페이Pompeii
자전거나라 남부환상투어는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앞에서 출발한다. 산타마리아마조레 성당은 떼르미니역 24번 플랫폼 쪽에서 떼르미니역을 등지고 3블럭 가면 있다. 0610에 고려민박에서 해주신 아침식사를 하고 0650 버스 탑승. 일찍 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버스 거의 꽉 차고 기사님 오른편은 커녕 왼편에도 수두룩 했다. 폼페이까지 가는길이 3시간 정도 걸렸는데, 출발 1시간 정도 후에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번 내렸다. 이곳 휴게소에서는 꼭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 휴게소에 슈퍼에서 그날 흡입할 포켓커피와 물을 쟁여놓는 것도 좋다. 포켓커피는 이탈리아 특산품으로 커피가 든 초콜렛이다. 보통 18개들이가 5-6 유로 내외이다. 떼르미니역 1번 출구쪽 슈퍼가 가장 싸다고 한다. 포켓커피는 가히 한국인이라면 누구든지 태어나서 처음 맛보고, 죽을때까지 생각나는 맛을 가졌다고 봐도 좋다. 누텔라에 버금간다고까진 못하지만 나름 중독성 있다. 아무튼 가이드님 설명 덕분에 언제 왔는지 모르게 폼페이에 도착했다.

 

폼페이는 중개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항구도시이자 로마 상류계급의 보석같은 휴양도시였다. 기원전 89년 로마에 귀속된 이후, 로마 도시계획이 철저하게 이식된 도시였다. 이미 기원후 63년 2월 대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지만, 도시는 재건되었다. 화산폭발 직전에도 화산은 심상치 않아, 일부 폼페이 시민은 외곽지역으로 대피하였다. 한편에서는 불의 신 불카누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기원후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다. 아침부터 역삼각형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정오가 되자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였다. 화산은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오프론티스 및 캄파티아 지역을 따라 항구도시 미세눔과 나폴리까지 지진이 감지되고 구름띠가 퍼졌다. 나폴리 남동부 폼페이는 이 화산폭발로 폭망했다. 하늘에서 흙과 돌비가 엄청나게 쏟아져내려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었다. 폼페이 시민들은 화산에서 날아온 돌비에 맞거나, 지상을 뒤덮은 고온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죽었다. 당시 폼페이 인구 10퍼센트인 2천여명이 죽었다. 미세눔에 거주하던 로마 지중해 함대사령관 대플리니우스는 화산활동의 심각성을 보고받고, 폼페이로 향하던 항해중 질식사 했다. 그의 조카 소플리니우스는 다행히 학업때문에 따라가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플리니우스는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베수비오 화산폭발에 대해 2통의 편지를 보낸다. 당시 로마황제 티투스는 곧바로 구제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신속하게 구조팀을 급파했으나, 구조팀이 당도했을때 이미 폼페이는 3층 높이 화산재 밑으로 가라앉은 후였다. 구조팀은 평평한 화산재 위에서 폼페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 헤매었으나, 실패했다. 폼페이는 그들의 발 보다 6, 7미터 아래에 있었다.

 

1592년 옛 폼페이 지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적발굴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1748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폼페이 발굴을 시작하였으나, 이는 약탈이지 발굴이 아니었다. 고가의 출토품만이 발굴되었을뿐, 나머지는 사장되었고, 모자이크, 벽화 등 미술품들은 충분한 조사 없이 프랑스 왕궁으로 전달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국민 역사의식 고양을 위한 폼페이 발굴 및 복원이 시작되었다. 통일 이탈리아 초대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을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폼페이는 겨우 구획정리와 본격적인 수리 및 보존이 시작되었다. 발굴단은 유적이 층층이 쌓여있는 빈공간에 의문점을 갖고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화석은 실제 사람 뼈나 잔해가 아니라 석고이다. 석고로 재현한 형상은 폐에 가득찬 유독가스로 인하여 괴로워 하며 공중을 허우적대는 사람,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고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사람, 영문을 모른채 괴로움에 휩싸여 온몸이 뒤틀린 개 등으로 당시 위급하고 절망적이던 현장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후로 폼페이 발굴은 지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80퍼센트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물은 주로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폼페이가 특이한 점은 로마의 도시계획을 그대로 이식했으며,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유적이라는 점이다. 로마에도 포로로마노가 있지만, 폼페이의 광장은 당시의 도시 모습을 매우 근접하게 재현한다. 폼페이는 한변이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서쪽에는 광장이 있고, 그 주변으로 신전, 시장, 관공서가 모여있다. 도시를 잇는 도로들은 포장이 되어 있으며, 차도가 인도보다 낮게 건설되어 구분이 명확하다. 차도 양쪽에 있는 인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도 있다. 차도는 검은 색이지만, 밤에는 건물 벽에 횃불을 꽂고 불빛을 비출수 있는 흰돌을 사이사이 박아 현재의 도로등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와 사거리에는 공동수도 및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는 수도관 시설이 발견되었다. 공중목욕탕, 체육관, 극장 및 1만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도 발굴되었다. 제과점 화덕에 불에 구운 빵 화석, 술집 테이블 위에 작은 술잔이 그대로 남아있어 급작스런 화산폭발에 아무 대처할 수 없었던 폼페이 시민들의 안타까움을 전해준다.

 

 

폼페이 유적 입구. 왼쪽 사이프러스 나무 뒤쪽으로 보이는 말뚝이 배를 정박시켰던 항구라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2천년 전이었는데 여기가 바닷가였다니. 지각활동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폼페이 입구. 얼핏보면 그냥 시골 마을길 같은 느낌이 든다.

 

 

 

 

 

 

폼페이 마을 초입. 이 길을 따라가면 광장이 나온다. 도로가 아직까지 이렇게 잘 포장되어 있다.

 

 

 

 

 

 

마차가 다니는 검은 차도 위에 박힌 하얀 돌들은 밤에 횃불빛을 반사하여 길을 밝혔다.

 

 

 

 

 

 

 

 

 

 

다행히 날이 매우 맑아서 베수비오 화산까지 잘 보였다.

 

 

 

 

 

 

폼페이의 강아지. 주민이 없으니 주인이 없다.

 

 

 

 

 

 

 

 

 

 

전체적인 광장의 풍경. 광장은 매우 넓다. 가로세로 100미터는 되어 보인다.

 

 

 

 

 

 

 

 

 

 

양식어시장. 비석 가운데 부분에 물을 채워놓고 생선을 금방 떼 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가 해안이었다는게 새삼 놀랍다.

 

 

 

 

 

 

 

 

 

 

화산폭발 당일, 화산재에 질식하거나 돌비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석고상. 매우 생생하다.

 

 

 

 

 

 

 

 

 

 

시장으로 추정되는 건물 벽화. 혹은 유곽이었나.

 

 

 

 

 

 

치킨가게. 치느님에 대한 숭배는 인류와 역사를 같이했다.

 

 

 

 

 

 

 

 

 

 

대중목욕탕 옆에는 헬스장이 있다. 어찌보면 목욕탕 옆 헬스장이 아니라, 탈의실이 있는 종합체육관이었나보다. 남녀노소 레슬링을 즐겼다.

 

 

 

 

 

 

대중목욕탕 입구에는 우선 각자 몸을 씻는 탕이 있다. 운동하고 나온 땀과 땟국물을 씻어낸다.

 

 

 

 

 

 

 

 

 

 

대중목욕탕 입구쪽 창문. 밖에서 보이면 안되고, 빛은 받고, 열기는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 창문을 뚫고 벽을 파냈다.

 

 

 

 

 

 

 

 

 

 

 

 

 

본격적으로 대중탕에 입장하기 위한 탈의실. 옷을 벗어서 저 부조 사이에 있는 칸에 두면 나중에 노예가 옷을 가져다 준다. 서로 옷을 구별하기 위해서 벽감에 서 있는 부조상의 팬티치마를 모두 다른 디자인으로 했다. 프로젝트 런웨이 폼페이 돋네.

 

 

 

 

 

 

 

 

 

 

 

 

본격적인 대중탕 내부. 열기도 더 많고 창도 더 많다.

 

 

 

 

 

 

 

 

대중탕 내부 벽. 하중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아치로 설계하였는데, 더 놀라운 것은 현대에서처럼 천장에 홈을 파서 물방울이 맺히면 홈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했다. 게다가 끝까지 흘러내리지 않고 중간에 내부 열기로 다시 그 물이 승화하여 대중탕 내부를 따뜻하게 데웠다. 놀랍게도 대중탕은 온돌로 되어 있으며 뿐만 아니라, 벽 내부에도 공간을 만들어 뜨거운 수증기가 순환하도록 했다.

 

 

대중탕에는 온탕과 열탕만 있지 않다. 현재와 똑같이 냉탕도 있다. 이 대야에 차가운 물을 계속 받아, 열기를 식히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물을 떠 세수를 했다. 대리석의 나라답게 대야도 통크게 통대리석을 썼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나라 로마에서는 폼페이의 어느 귀족이 이 대야를 기증했다고 한다. 물론 완전한 선의는 아니고, 다음번 선거에 어느 집안의 누가 나간다는 말을 대야 모서리에 저렇게 써서 새겨둔 것이라고 한다. 우리로 치면 목욕탕에 거울을 기증하고 '기 이상준 증 - 2014년 마포을 출마 예정 -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공중목욕탕에서 나오면 보이는 펍. 지금 술집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펍에서 맥주스탠드를 두듯이 구덩이 같은 곳에 음료를 두고 바텐더가 음료를 팔았다.

 

 

 

 

 

 

 

 

 

어느집 입구 바닥의 개 모자이크. "개조심!"

 

 

 

 

 

 

 

 

 

 

 

 

 

 

 

 

 

 

도시 중앙에 있는 수도. 누구나 여기 와서 물을 퍼가거나 마실수 있다. 이 돌에 손을 집고 마셨다는 증거가 돌 왼쪽 귀퉁이가 많이 닳아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반증으로 폼페이에도 오른손잡이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수도에 관해서는 정말 놀라운 것이, 2천년 전 사람들인데, 수십 수백킬로미터 너머에서 물을 끌어오고, 그 물을 공공에게 배분해서 누구나 부족함 없이 물을 받아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자기 발 아래에서 물이 안나와서 목말라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피자 화덕.

 

 

 

 

 

 

 

 

 

 

 

 

 

 

 

HAVE! 고대라틴어로 환영한다는 뜻이다.

 

 

 

 

 

 

 

폼페이부잣집의 바닥모자이크. 부잣집바닥은 거의 모자이크 도배이다. 기원전인데도 나름 원근법, 단축법을 시도했다. 누워있는 사람이 짤막하다.

 

 

 

 

 

 

 

 

 

 

 

 

폼페이 최고의 갑부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파우니의 집Casa del Fauno. 이 청동상이 반인반양 파우니신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파우니 청동상이 있는 곳은 임플루비움 impluvium 으로 집 입구에 천장을 없애고 빗물을 받아 관상용 또는 실용으로 썼던 저수조이다. 잘 보이지 않지만, 임플루비움의 돌들은 물을 뿌리면 선명한 색을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이 차있으면 반짝반짝 보석같은 효과를 낸다.

 

 

 

 

 

 

 

벽돌에 저렇게 돌기가 있는게 레고처럼 끼워맞추라고 그런건가.

 

 

공중화장실. 둘레를 둘러싼 홈으로 오물들이 쏟아져 나가는 원리이다. 튀어나온 돌과 돌 사이에 원래 나무판자 혹은 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해면을 꽂은 막대기를 받는다. 일을 보고 해면으로 뒤를 처리한다. 오물은 사진 오른쪽에서 흘러나간 물을 타고 반대편을 돌아 밖으로 빠져나간다. 자연히 마지막에 앉아있는 사람은 찝찝하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오른쪽 좌석이 왼쪽 좌석보다 비싸지게 되었다. 로마의 공중화장실은 다른 국가로도 수출되었는데, 터키의 경우, 화장실 가운데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까지 고용되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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