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걸어나온다고 해도 기적이라 부르지 않을거야.
정말로 깊은 심연을 뚫고 거기서 나왔대도 기적이라 부르지 않을거야.
눈물 하나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온다고 해도 기적이라 부르지 않을거야.
네가 정말 걸어 돌아와도 절대 기적이라 부르지 않을거야.
네가 얼마간 나이를 먹어 철없는 대학생활을 하고, 진탕 술을 먹고 취해서 아무데서나 자고,
쉴새없이 미팅 소개팅을 해서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사귀고, 몇번을 깨지고 다시 사귀고,
또 더 얼마간 나이를 먹어 어렵게 어렵게 좋은 직장을 얻고, 회사에서 깨지고 다시 붙고 단단해지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해서도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힘들게 힘들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갓 낳은 아이가 자지않고 보채 울면 따라 깨서 울면서 달래고,
그 아이가 커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이를 먹고, 아이때문에 울고 웃고 싸우고 다시 행복해지고,
삭신이 쑤신다며 허리 무릎을 두드리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기적이라 부를거야.
너를 두고 나는 기적이라 부를거야.
지금은 기적이 아니야.
네가 살아오는 것, 그건 기적이 아니야.
그건 필연이야.
1995년 여름이 기억난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매일매일 구조현장이 생중계되던 때였다. 때이른 방학이었는지, 주말이라 그랬는지 집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구조요원들이 담요덮인 들것을 들고 흙더미속에서 걸어나올때, 그 담요 사이로 잠깐 발이 비췄던 것. 마지막 구출자, 최후의 생존자였다. 마침 돌리던 훌라후프가 떨어지면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앉아 멍하니 구출장면을 보고 있었다. 울거나 웃지도 않았다. 눈물고 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일상속의 한장면 같았다. 마치 가벼운 교통사고나 화재현장에서 사람을 구해나오는 그냥 평범한 구출장면. 기적이라거나 우연이라거나 그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어제도 생겼고 내일도 생길수 있는 천만가지 일상 중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텔레비젼 속에서 앵커들은 신나고 흥분되어 있었지만, 집에서 텔레비젼을 보는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 구출은 아주 조용히 평화롭고 느리게 시간이 흘러갔다. 천재든 인재든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운명이나 팔자로 설명하기에도 너무 진부하게, 사고는 항상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고 속에서 생존해 나오는 것도 반드시 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