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447

숨Exhalation 테드 창Ted Chiang / 김상훈 엘리 27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세월의 문'을 이용한다는 것은 결과를 모른 채 제비를 뽑는 행위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궁전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을 닮았습니다. 정상적으로 복도를 거쳐 가는 것보다 더 빨리 목적하는 방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 말입니다.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 방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까?" "회개와 속죄는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유감이군요. 제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미래 또한 다르지 않다는 ..

독서 2020.11.10

적의 화장법

적의 화장법Cosmetique de l'ennemi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 / 성귀수 문학세계사 45 "무엇보다도 장세니즘이 마음에 들어요. 그처럼 부당한 교리일수록 구미가 당기거든요. 그야말로 진지한 잔인성을 가능케 하는 이론이지요. 사랑처럼 말입니다." 62 "강간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꺼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말이오." "법이라. 보아 하니 입만 열면 법 얘기인데, 당신이 그 짓을 하는 동안 그 불행한 여인이야말로 머리 속에 법을 떠올렸으리라는 생각은 안합니까? 아무래도 당신이 직접 강간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려." "나도 무척이나 바라던 바요. 한데, 아쉽게도 내게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는..

독서 2020.11.10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The Invention of Yesterday 타밈 안사리Tamim Ansary /박수철 Connecting 대한민국은 산업화 시대를 거쳐 정보화 시대에 누구보다도 빨리 적응하고 도구들을 이용하여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초시대, 메카트로닉스, 인공지능, 자율주행 같은 말들이 더이상 낯선 단어들이 아니다. 6.25도 있었고, 황금경제기도 있었고, IMF와 금융위기도 거쳐왔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한국의 역사 그 어느때보다도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눈 뜨고 일어나면 어제와 다른 오늘의 신기술이 뉴스를 장식한다. 타밈 안사리는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인간이 창조한 존재가 전 세계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이를 기..

독서 2020.11.05

돌이킬 수 있는

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아작 177 "보세요. 이게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는 타오름을 멈춘 불 사이를 스치며 걸었다. "만약 여기서 비원 사람을 마주치면, 난 내가 멈춘 불을 집어다 그 사람 입속에 넣고 능력을 풀 거에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불길은 그 사람과 목과 폐를 태우겠죠. 여기는 그런 사람이 지휘하는 곳이에요. 눈으로 봤으니, 직접 생각해서 결정하세요. 이런 데에서 도망치는 데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윤서리는 정지한 불 안에 들어가 섰다.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애써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거짓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거짓말하면서 여기 있을게." 속뜻을 알 리 없는 정여준은 걱정스러운 마음만으로 눈썹을 구겼다...

독서 2020.10.29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Ending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 최세희 다산책방 26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가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부석이라기보다는 제..

독서 2020.10.28

플로리다

플로리다Florida 로런 그로프Lauren Groff / 정연희 문학동네 41 둥근 지구, 그 가상의 구석에서 이제 가자, 아버지가 말했다. 주드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따라갔다. 픽업트럭을 타고 두 시간을 달린 뒤에야 주드는 지금 그들이 함께 뱀을 잡으러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어렸을 때는 따라가겠다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번번이 안 된다고, 너무 위험하다고 말했었다. 주드가 독과 총이 가득하고 알 수 없는 배선 장치가 되어 있는 집에 어린아이를 혼자 일주일 동안 방치하는 것도 똑같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며 맞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49 둥근 지구, 그 가상의 구석에서 집에서 처음으로 아기를 안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여태 이 울긋불긋한 살덩이에게 겁을 집어먹은..

독서 2020.10.26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제니퍼 라이트Jennifer Wright 저 / 이규원 역 산처럼 183 나병 이런 이야기는 암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버려졌다고 느낀 나환자들에게 다시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분명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나환자 악단이 심야 쇼 프로에 출연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환자들은 그들의 삶이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정말로 바란 건, 병에 걸리기 전에 즐겼던 활동에 어떻게든 참여하여 잠시나마 평범했던 예전의 자신을 느껴보는 것이었을 테다. 아마도 그것이 질병을 앓는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래서 도보 경주에서 발가락 없는 환자가 출발선에 '발가락 끝을 대지' 못했을 때 절망이 ..

독서 2020.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