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나라 황혼의 나라 이정하 내 사랑은 탄식의 아름다움으로 수놓인 황혼의 나라였지. 내 사랑은 항상 그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가도가도 닿을 수 없는 서녘하늘, 그곳에 당신 마음이 있었지. 내 영혼의 새를 띄워 보내네. 당신 마음 한 자락이라도 물어오라고. 감상 2014.03.23
산산조각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 감상 2014.03.23
첫눈 첫눈 김경미 마침내 그대편지가 오고 천천히 밖으로 나선다 하늘이 낮고 흐리고 어둑하니 자꾸 뒤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대로 다했고 무엇을 못했을까 뱀의 머리위를 지나듯 살라 했건만 낙엽밟듯 살아왔을까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줄 이제야 알겠거니 너무 많이 화를 내거나 .. 감상 2014.03.23
피서 피서 김향숙 큰 산맥 아래서는 해가 일찍 저문다 붉은 노을 끝으로 산 중턱에서 별이 툭툭 불거지는 진부령 소똥령 마을 평상에 나와 앉아 산나물, 추어탕으로 저녁을 먹고 가마솥에 끓인 구수한 누룽지 숭늉 맛에 모두들 이야기가 길어졌다 큰 아이는 아버지 따라 밤고기 뜨러 가고 모기.. 감상 2014.03.22
부재(不在) 부재(不在)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들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세월(歲月)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 감상 2014.03.22
꿈 꿈 이경희 아침에도 그가 사는 집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면 그 사람 묵은 그림처럼 익숙하게 그 자리에 있는 거기, 오래 된 책들이 먼지 캐캐히 꽂혀 있고 겨울이면 난로가 있을 자리에 여름이면 어딘가에서 꺾어온 꽃뭉치가 콜라병이나 사이다병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거기, 왔어? 하.. 감상 2014.03.22
그런 날 그런 날 남진우 그런 날 하루 종일 바람은 불고 마음은 천장 구석의 얼룩을 따라 한없이 번져가고 싶은 오후 뒷문 덜컹이는 소리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고 느지막이 몸 일으켜 창문을 열면 가로수와 전깃줄 사이를 헤매는 눈송이가 보이고 두터운 옷 뒤집어쓴 사람들 느릿느릿 거리를 .. 감상 2014.03.22
점성술이 없는 밤 점성술이 없는 밤 이장욱 별들은 우리의 오랜 감정 속에서 소모되었다. 점성술이 없는 밤하늘 아래 낡은 연인들은 매일 조금씩 헤어지고 오늘은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떠있습니다. 직녀자리 전갈자리 그리고 저기 저 먼 하늘에 오징어자리가 보이십니까? 오징어들, 오징어들, 밤하늘의 .. 감상 2014.03.22
눈 눈 이은봉 눈이 내린다 두런두런 한숨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뺨 부비며 눈이 내린다 별별 근심스런 얼굴로 밤새 잠 못 이룬 사람들 사람들 걱정 속으로 눈이 내린다 참새떼 울바자와 내려와 앉는 아침 아침 공복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뽀드득뽀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감상 2014.03.22
딸아 미안하다 딸아 미안하다 문정희 딸아, 미안하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능한 나라의 치욕과 적국을 향한 분노로 소리 지르다 말고 나는 목젖을 떨며 깊이 울어야 한다 기실 나는 민족을 잘 모른다 그 민족의 주체가 남성인 것도 모른다 다만 오늘 네 앞에 꿇어 엎드려 울음 우는 것은 너의.. 감상 2014.03.20